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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대통령과 그저 그런 대통령
<양준용 칼럼>
12/22/2024
트루먼(H.S.Truman) 대통령 내외는 1953년 1월 아이젠하워 후임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후 곧바로 고향인 미주리 주 인디펜덴스로 돌아 갔습니다. 한적한 시골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몇주일이 지난 다음, 주변의 권유에 못이겨 내외가 하와이 여행을 다녀 오기로 했습니다. 선박 여행을 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가야 했습니다. 선박회사의 사장 죠지 킬리온씨가 대통령 내외를 저녁 식사에 초대, 자신의 집을 방문해 줄것을 요청했습니다. 모처럼의 호의를 거절 할수 없었던 트루먼 전 대통령 내외는 지인이 제공해 준 승용차를 타고 킬리온 사장의 자택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운전해준 사람이 집 주소를 잘못 찾은 탓에 남의 집 앞에 내리고 말았습니다. 웅장해 보이는 저택앞에 내린 트루먼 전 대통령은 초인종을 누르고 킬리온 사장을 문앞에서 기다렸습니다. 집 주인이 나타 났습니다. “ 킬리온씨 댁입니까” 방문객의 정중한 인사에 집 주인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집을 잘 못 찾았네요. 킬리온씨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을 닫으려던 집 주인이 불의의 방문객을 힐끗 힐끗 쳐다 보면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너무 마음을 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실례지만 선생께서는 그 지긋 지긋한 시골뜨기 해리 트루먼을 너무나 닮았네요.”라고 말했습니다. 트루먼은 빙긋이 웃으며 “그 쪽이야 말로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바로 그 해리 트루먼 이거든요.”라고 답했다 합니다. 임기를 마칠 무렵 트루먼 대통령의 인기는 이 일화가 말해 주듯 바닥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말 급사한 루우즈벨트( F.D.Roosevelt)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마친후 재선에 도전한 트루먼 대통령 후보는 당선 가능성 10% 이하의 늪에서 허덕여야 했습니다. 당시의 여론은 공화당 후보인 토마스 듀이 당시 뉴욕 주 지사의 일방적인 승리를 점치고 있었습니다. 1948년의 공화당 지명대회는 듀이 승리의 확신이 넘치는 대회였지만 민주당의 지명대회는 트루먼 이외의 대안을 찾다가 지쳐버린 김빠진 대회였습니다. 당대회가 끝난 직후 뉴욕 트리뷴지는 “민주당은 지금 공화당의 듀이 후보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고 무의미한 선거전을 중단하라”고 권고하는 사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후보 지명을 받은 트루먼이 당 대회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지지자들이 꽃으로 만든 평화의 상징 <자유의 종>에서 비둘기 50마리를 공중에 날려 보냈는데 이 중 한 마리가 대회장의 기둥에 부딪쳐 그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한 대의원이 단상의 트루먼을 향해 “ 비둘기가 죽었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초상집 분위기의 당 대회에 찬 물을 끼얹는 촌극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선거전은 시작되었고 민주당원들은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민주당 안에서 트루먼 승리를 믿는 사람은 트루먼 자신 한사람뿐이란 농담만 무성했습니다. 미 대륙을 거의 혼자서 횡단하며 정력적인 유세전을 펼쳤지만 여론은 여전히 듀이 승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트루먼의 외동딸 마아가렛은 “아버지가 자신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말하자 선거전을 수행한 신문기자들이 미친듯이(hysterically) 웃었다”고 기록했습니다. 11월 2일 투표일의 밤이었습니다. 처음 발표된 개표 속보에서 트루먼이 선두를 달렸지만 미 전국의 라디오 해설자들은 “이 개표 결과는 도시 지역의 개표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국 규모의 개표가 진행되면 트루먼의 리드는 곧 뒤집혀 질 것입니다. 민주당의 승리는 생각할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해설했습니다. 한 밤중까지도 트루먼의 우세가 유지되었지만 라디오의 해설들은 여전히 듀이의 압승을 예고 했습니다. 새벽 4시경 트루먼이 200만표 이상을 리드하자 한 저명한 정치평론가가 “ 어떻게 해서 트루먼이 선거를 이겨가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 할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투표 다음날 승자와 패자는 확연이 들어 났습니다. 오전 11경 공화당의 듀이는 패배를 인정했고 차기 대통령 트루먼은 고향을 떠나 워싱턴 DC로 향했습니다. 중간 기착지인 세인트 루이스에서 기자들로부터 질문 공세를 받고 있던 그의 손에는 당일 아침에 배달된 조간 신문 시카고 트리뷴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신문은 “듀이, 트루먼에게 패배를 안기고 승리하다”라는 제목의 톱 기사를 대형 활자로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48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는 신생국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는 거의 완벽하게 관심밖의 행사였습니다. 건국 초기에 해결해야 할 국내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 건너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 시선을 보낼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거가 있은지 바로 1년7개월 뒤에 발발한 6.25 전쟁과 <듀이 패배, 트루먼 승리>의 선거 결과를 연결해 보면 한국의 운명이 풍전 등화와 같았다는 생각을 버릴수 없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나자 신속하게 미군의 한국 전쟁 참전을 결정했고 당시의 공화당은 미군의 한국전 참전을 반대하는 분위기 였으니까요. (공화당의 후버 전 대통령은 미군의 한국 파병을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만약 트루먼이 선거 전의 예상대로 낙선했더라면 오늘의 한국이 존재 할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나는 전날 밤 딸 마가렛에게 “ 너의 아빠는 위대한 대통령 중에는 끼이지 못하나 나라를 위해 전력을 다한 대통령이었다는 점은 믿어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6년뒤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도 그는 “대통령들 중에는 위대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자신이 위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인도 위대해 지려고 쉴틈없이 노력해 왔다는 점은 사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은퇴 당시의 트루먼 대통령은 거짓말 장이, 사기꾼, 음모 책략가 등등의 평가와 함께 최악의 대통령 리스트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자취를 감추고 “솔직하고 자주적이며 결단력과 신념이 뚜렷한 용감한 정치지도자” 라는 재 평가가 전문가들 사이에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대통령직 성적표와, 그의 결단에 의해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자생의 기적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위상이 동반 성장을 이룬 셈입니다. 그는 7.80년대를 거치면서 <위대한 대통령>의 자리에 안착하기에 이르렀고 Repulic of Korea는 2차 대전 후에 독립을 쟁취한 국가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009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5명중의 한 사람에 포함 되기도 했습니다 이명박대통령이 위대한 대통령과 그저 그런 대통령의 위상중 어느쪽에 자리를 잡을찌 앞으로 1년 8개월의 치적이 가름할것 같습니다. 레임 덕의 쓰나미가 꽤 험난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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