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시대의 스승 김준엽 전 총장님을 추모합니다.
영원한 총장 / 시대의 스승 / 영원한 스승 / 만인의 스승 / 진정한 선비 / 한국현대사 꼿꼿한 지성 / 꼿꼿한 학자 / 마지막 광복군 / 영원한 광복군 / 독립운동가
시대의 스승 김준엽 전 총장님이 지난 6월 7일 별세하셨습니다. 부고를 접한 교우들의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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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같이 선비의 지조를 볼 수 없고, 본이 되는 사회 원로가 보이지 않는 시대에, 우러러 볼 수 있었던 한 분이 가시니 참으로 슬픕니다. 시대가 이제는 그런 선비를 배출하지 않으니 이런 분과 같은 스승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 그분의 타계가 더욱 아쉽습니다. 또 한 번 한 시대의 마감을 겪는듯 합니다.
김준엽선총장님은 이용익선생을 시작으로 손병희, 김성수, 현상윤, 김상협 선생 등 민족고대를 일으킨 근대민족사에서 빼놀수 없는 역사적인 인물들의 혈맥을 이어오는 분으로, 현시대에 있어 고대에 가장 고귀한 정신적 유산이 되시는 분이라 생각됩니다. 공사석에서 고대는 민족의 대학임을 늘 높이 표방하신 분입니다.
그 분의 타계를 기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그의 생애를 통하여 남기신 가르침을 되 새기며, 고대에 그분을 닮는 스승들의 혈맥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김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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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자유, 정의, 진리를 외치지 않고 삶으로 자유, 정의, 진리를 실천하였고 고대를 나오지않았고 호안(虎顔)도 아니고 호랑이 눈썹도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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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하루를 알 수는 없으나 인생은 알 수가 있다. 이 죽음이라는 분명한 사실 앞에 나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인품이 죽음을 통해서 더 들어나는 것은 현재의 내 삶에 대한 경책이 아닐까?
오늘 초라한 노친네 한사람이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모르게 슬픔이 밀려 온다. 한번도 만난 적도 없는데…
인품에 대한 흠모는 만남과는 관계가 없나 보다
가도 간것이 아니요 와도 온 것이 아니라는 옛 말은 삶의 지조를 지키며 일생을 산 분에게만 부쳐드릴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계셨으니까!
존경할 만한 사표가 없는 시대에 대한인으로서의 사명감과 학자로서의 위엄과 고대인을 아껴준 진정한 스승에게
마지막 감사의 눈물을 흘려 본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의 눈물을 … 영원히 지원지지 않는 존경의 눈물을 …
이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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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엽 총장님은 언제나 "선생님"으로 불리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지도교수여서 자주 뵈었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굴어도 항상 환한 미소로 반겨 주시던 은사였습니다.
김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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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위대한 스승님이신 김준엽 총장님이 서거하셔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장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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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하신 김준엽 총장님의 영면하심을 함께 애도 드립니다.
뉴욕 이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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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엽 전총장 기사문: 아시아경제
'시대의 스승' 김준엽 前고려대 총장
일제 강점기 때 학병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투신한 독립투사. 정부에 맞서 학생들을 지키려다 총장직에서 물러난 시대의
스승. 수차례 고위 공직을 사양하면서 한눈팔지 않고 평생을 학문에만 힘쓴 절개와 지조. '시대의 지성'으로 길이 남을
김준엽(사진) 전 고려대 총장이 7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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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 찾은 그의 빈소엔 차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대학 총장, 한국교류재단 이사장 등의 이름이 적힌 조화들
사이로 조문객을 맞고 있는 부인 민영주 여사와 아들 김홍규씨의 모습이 보였다. 김씨는 목례를 한 뒤에야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고대 총장을 하시던 1984년의 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소 지친 표정의 김씨는 1984년 11월
민정당사 점거 농성 때의 일화로 아버지를 회상했다. 당시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 3개 학교 학생 260여명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민정당사 점거 농성을 벌이다가 연행된 일이 있었다. 김 전 총장은 학생들을 제적하라는 전두환 정권의 압박에 맞서 눈 하나
꿈쩍 않고 버텼다.
온 몸으로 학생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뿐이었다고 한다. 다른 교수들과 학생들에 대한 조치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교수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는 상을 내리치며 화를 냈던 그다. 학생들을 제적시키는 것은 사회적으로 사형을
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제자들의 죽음 앞에서 밥이 넘어가느냐는 질책이 이어졌다. 김 전 총장은 그 자리에서 끝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한결같이 꿋꿋함을 간직했던 김 전 총장은 1944년 일본 게이오대에서
유학하던 때 학병으로 강제 징집됐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입대하게 된다. 독립투사로서의 첫 발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돼 특수 공작훈련을 받은 그는 김구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를 위해 뛰었고, 그렇게 광복군 마지막 세대로 이름을
남겼다. 해방 뒤 1949년까지 중국에 남아 중국국립동방어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는 그 해 귀국해
고려대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조교수에서 부교수, 교수를 거쳐 1982년 총장에 오를 때까지 30년 넘게 중국 근대사를
맡아 강의를 했던 김 전 총장은 학교 내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우고, 중국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한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 맺기에도 발벗고 나섰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김대중 정권 때까지 국무총리를 비롯한 관직 제의를 수차례나 거절한
그는 자유, 지성, 정의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보냈다. 아들 김씨는 "아버지께선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서재에서 책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셨는데, 평생 동안 단 하루도 어김이 없었다"며 "화투나 장기, 바둑, 낚시 등도 즐기지 않으셨고
백화점이나 상점에서 돈을 내고 물건을 산 일이 일생에 열번도 안될 만큼 꼿꼿한 삶을 사셨다"는 말로 아버지의 일생을 전했다. 김
전 총장은 1920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나 신의주동중학교를 졸업했고, 미국 하버드대 교환 교수, 고려대 총장, 사회과학원
이사장, 중국 베이징대 명예교수 등을 지냈으며 독립운동유공표창과 국민훈장 모란장, 건국훈장 등을 받았다.
“전두환에게 굽실거릴 수 없다” … 노태우의 총리 제의 거절
한국 현대사 ‘꼿꼿한 지성’ 김준엽
일제강점기 학병(學兵) 탈출 1호,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펼쳤던 투사, 해방 후 1세대 중국학·공산주의
전문가, 역사학자, 대학총장…. 예사롭지 않은 삶이었음을 일러주는 이력인데, 그 모든 화려한 호칭과 수식어보다 ‘지성의 절개’라는
담백한 표현이 잘 어울렸던 사람-.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만 90세 일기는 파란만장했지만 소박했다.
고인은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는 좌우명처럼 살다 갔다. 후학들에게 이런 말도 남겼다. “‘역사의 신’을 믿으라.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1985
년 2월 고려대 졸업식 풍경은 아주 예외적이었다. 재학생과 졸업생이 총장 사퇴를 반대하는 시위 속에 식이 진행됐다. 82년 고대
총장이 된 고인은 정권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다. 데모 주동자를
징계하라는 압력에 그는 “내가 그만두겠다”고 버텼다. “김준엽 총장 사퇴 반대” 시위가 1개월 넘게 이어졌다.
‘총장 사퇴하라’는 시위에 익숙한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매우 예외적 존재였다. 그 시절 대학을 다닌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김준엽 총장이 받은 많은 훈장 중 최고의 영예로운 훈장”이라고 기억했다.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부딪쳐 온 고인의 일생엔 두 차례 결정적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1944년 일본 게이오(慶應)대
사학과에서 유학하던 21세의 청년 김준엽은 학병으로 강제 징집당했다가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첫 번째 선택이었다. 회고록
『장정(長征)』(전5권·나남)에서 그는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고 술회했다. 일본군 탈출 후 중국 유격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하다가 다시 6000㎞를 걸어 충칭(重慶)의 우리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과정은 대하드라마 그 자체다.
김준엽은 해방 이후
‘사상계’ 발행인으로 유명해진 장준하에 대해 “학병 탈출 이후 중국 유격대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동지로서 함께 지냈다”며 “회고록
『장정』은 장준하와의 연인과 같은 우정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광복군 마지막 세대인 그는 한·미 합동 군사작전을 위한 특수훈련까지 받은 정예 독립투사였다. 미
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특별훈련을 받고 국내 지하공작원으로 진입을 준비하던 중
일본의 항복을 맞이했다.
해방 후 백범 김구는 그에게 함께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했다. 정치를 하자는 제안을 뒤로 하고 그는 학자의 길을 걷는다. 초대 내각 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도 거절했다. 두 번째 선택이었다.
고인은 정치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현대 중국과 공산권을 연구한 1세대 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키워냈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중국공산당사』 『중국 최근세사』 등을 펴냈다.
85년 고려대 총장직을 그만뒀지만 그에겐 ‘영원한 총장’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유혹은 많았으나 다른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를 ‘지조(志操)의 선비’로 기억하게 하는 이유다.
88년 1월 대통령 당선자 노태우는 궁정동 안가로 김준엽을 초빙해 국무총리직을 제안한다. 그날의 대화를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놓았다(『장정』 4권 참조). “첫째, 노태우 당선자를 두 번 만난 일은 있지만 잘 모른다. 덮어놓고 중책을 맡는 풍토는
고쳐져야 한다. 둘째,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씨에게 총리로서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고개를 숙일 수 없다. 이건
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내가 전씨 앞에서 굽실거리는 모양을 TV를 통해 보는 국민들, 특히 젊은층들은 실망할 것이다.
셋째, 나는 지난 대선 때 야당 후보자를 찍었다. 넷째, 나는 교육자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이 아직도
감옥에 있다. 제자가 감옥에 있는데, 스승이라는 자가 어떻게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있겠는가. 다섯째,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굽실하는 풍토를 고쳐야 한다. 좀 건방진 말이긴 하나,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줘야겠다.”
그는 평생 고위 공직을 제의받았다. 초대 총리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4·19 혁명 후 장면 내각의 주일대사 제의→5·16 후
김종필의 공화당 사무총장 제의→1974년 대통령 박정희의 통일원 장관 제의→노태우 대통령의 총리직 제의→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의
총리직 제의 등이다. 모두 거절했다.
총장 퇴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회고록 집필이었다. 44∼45년
풍찬노숙(風餐露宿)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마지막 광경을 지켜본 그는 그 시절에 대한 기록(『장정』의 1, 2권 ‘나의 광복군
시절’)을 남기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88년 이후엔 사회과학원을 설립해 한·중 우호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베이징(北京)대를 비롯해 중국의 11개 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세웠다. 중국 교육부로부터 문화훈장에 해당하는
‘중국어언문화우의장(中國語言文化友誼奬)’을 받았다. 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인이 중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는 그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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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 Network 壹萬
미주 총연합회에서는 각 지역 교우회의 소식을 모아 북남미에 거주하는 모든 교우들에게 이메일로 전송해 드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총연에 등록되어 있는 이메일 주소를 10000개까지 확대하여 고대인의 물결이 북남미를 아우르며 널리 퍼져나가기를 소망하는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주변에 알고 있는 고대 교우 가운데 이메일이 지부 또는 총연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교우를 발견하시면 info@kuamerica.org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각 지부 주소록 담당 임원께서는 update 되는 주소록을 총연 본부로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미주 총연에 등록된 교우들께는 매달 1회 뉴스레터를 이메일로 발송해 드립니다.
총연 및 지부 소식
미주총연 정기 임원 월례회의 개최
고대 미주교우 총연합회 6월 월례임원회의가 지난 6월 14일 에 LA Oxford
Palace Hotel 에서 열렸습니다. 김성철 총연회장과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전미주 고대 교우들의 이메일 주소를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KU Network 10000 캠페인을 시행토록 결정하였습니다.
안성호 ATLANTA 교우회장 총연 방문
안성호 ATLANTA 교우회장 (기계 78)이 LA방문길에 총연을 방문하여 김창수자문위원을 비롯한 임원들과 만찬을 가졌습니다. 6월17일 Oxford Palace Hotel에서 있었던 모임에서 안성호 회장은 미주지역 교우들의 결속을 위해 총연이 큰 역할을 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각 지역 교우회 및 본교, 그리고 본국 교우회 간의 창구로서 많은 도움을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ATLANTA 지역은 미국 동남부 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2백여명의 교우들이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미주지역 고대 불자교우 연합회 9월 모임
미주 지역 연합회에서는 9월 중순경에 뉴욕과 워싱턴의 모든 회원들이 중간 지점인 펜실베니아 지역에서 합동으로 모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특히 이번 연합회 모임에는 가능하면 LA에 있는 회원들도 참석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번 모임에 관심 있으신 미주 지역 교우님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미주 지역 고대 불자교우 연합회
회장 윤 덕영(건축73) 합장.
dysyyn@hotmail.com 301-452-0345
“한일 4대학 연맹” 대표자 회의
지난 6월 30일 저녁 Los Angeles 소재 JJ Grand Hotel에서 “한일 4대학 연맹” 대표자 회의를 열고 제3회 AFUAA Golf Tournament 행사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제 209 회 고려대학교 남가주 골프클럽 토너먼트 안내
제3회 고대 남가주 골프 대회가 7월 9일(토) 개최됩니다.
부디 많이 참석하셔서 선후배님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번 대회는 고연전 대비 실전연습으로 각 팀이 2대 2로 조를 짜서 매치 플레이 형태로 진행하고자 하오니 당일 현장에 비치된 조편성에 의해 실전처럼 경기를 진행해 주시기 바라며, 회원 한 분 한 분이 올해는 고대인의 염원을 담아 정기전을 승리로 이끄는 주축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제 209 회 고려대학교 남가주 골프클럽 토너먼트 안내 >
1.일 시 : 2011년 7월 9일 (토) 12:00 (Head Count 11:00)
2.장 소 : Lakewood Country Club
3101 Carson Street, Lakewood, CA 90712
Office: (562) 429-9711
3.참가비 : $90 (61학번 이상, 91번 이하 및 여성회원: $70)
4.2011년 골프 대회 일정 :
10월 01일 Oak Quarry 고연전
11월 19일 10시 Wilson GC
5. 연락처 : 양윤천 회장(213-369-0562) 송승훈 부회장 (714-904-5024)
김성조 부회장 (714-675-9267) 김 용 총무 (310-387-2454)
배기성 자문위원님 모교 재학생에게 인턴십 제공
배기성 미주 총연 자문위원님께서 모교의 재학생 정왕표 후배에게 인턴쉽의 기회를 제공하여, 정후배가 이번 여름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배기성 자문위원께서는 뉴저지 지역에서 ACCESS BIO 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이에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국제실에서 감사 이메일이 왔습니다.
입실렌티 바베큐 파티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였지만 입실렌티 자녀 네 명을 포함 모두 즐거운 시간 가졌습니다. 특히 회장님께서는 토요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오렌지 카운티에서 일부러 먼 길 달리셔서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시고, 앞으로의 교우회 사업 계획에 대한 비젼 소개와 더불어 입실렌티의 젊은 의견을 모으셨으며, 격려의 말씀과 함께 입실렌티 활동기금 $1,000을 도네이션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기금은 다음 모임을 더 활발하고 알차게 계획하는데 소중하게 쓰일 계획을 의논하였습니다.
바베큐가 끝나고는 모두들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2002학번 이태화 후배가 경영하는 존슨 부대찌개 (JOHNSON HOUSE 3377 Wilshire Blvd #100 Los Angeles, CA 90010 TEL: (213)389-9946)에 모여 2차를 가졌습니다. 모임의 막내뻘인 이태화 교우는 이 날 모임의 엘에이 갈비와 와인삼겹살 구이를 비롯한 음식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오석 교우의 어머님께서도 많은 양의 김밥을 준비해주셔서 어머니 손맛이 그리운 젊은 교우들을 기쁘게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입실렌티 모임의 연령 특성상 젊은 부모들이 많은데, 외국생활의 어려움과 가족이 가까이 안계신 이유로 한자녀 가정이 대부분입니다. 형제가 없는 아이들이 어울려 놀며 즐겁게 지내고, 교우들은 서로 정보 교환도 하고, 육아와 교육에 도움도 주고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이어서 다른 어떤 모임보다 끈끈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자녀들 세대에서도 고대가족 쥬니어로서 부모 세대에서 해왔듯이 그들끼리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었으면..하는 개인적인 소망도 가져봅니다.
모교소식
교우회회장 새 후보로 이양섭 (상학 57) 교우 추천
이기수 전총장 단독 후보로 치러지는 것으로 알려졌던 교우회회장 선출이 새로운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고대교우회의 7인 전형소위원회는 6월 30일 이양섭(상학57) 교우를 단독 추대하기로 전원 합의하고, 이를
발표하였습니다.
7인 소위원회의 발표에 의하면, 소위원회의 추대가 7월 17일 총회의 인준을 거치면서 이양섭 교우가 차기회장으로
확정된다고 합니다. 이양섭교우는 교우회부회장 을 역임하였고, 또 경영대교우회회장을 역임하여 교우회 사정에 밝은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양섭교우는 경제계인물로, 정세영 교우가 회장시 현대자동차 사장이였으며, 그후 명신산업을 창업하여 경영하고 있습니다.
고대에 드디어 약학대학 출범
고대에도 약학대학이 출범하였습니다.
약학대학은 세종캠퍼스에 세워졌으며 10명의 교수와 신입생 29명. 전용 연구실험동을 신축하여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약학계에 전문 약학인이 고대에서 배출되는 시대를 연 것입니다.
국제재단 KAFE 후원
고려대학교가 미 교사들을 위한 한국 역사문화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습니다. 고려대 국제재단은 29일 LA 한국문화원에서 ‘2011 미국 교육자 대상 한국 역사·문화 세미나’를 개최하는 ‘한국 교육자 아카데미’(KAFE·회장 매리 코너)에 지원금 3,000달러를 전달했습니다.
고대인 이모저모
강석희 IRVINE 시장, 연방하원 출마
California 의 Irvine 시의 시장인 강석희(농경71) 교우가 연방의회로 활동 무대를 옮기기로 하고 내년에 있을 연방하원선거에 출마하기로 선언하였습니다.
지난 2004년에 Irvine 시의 시의원당선을 시작으로, 2008년엔 1세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직접 주민선거로 시장에 당선되어 현재 두번째 임기중입니다. 연방하원에 도전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선거자금 확보가 그 관건이므로, 이를 위하여 강시장은 교포들의 성원을 모아 후원회 구성을 추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진정한 앙트레 프레너 황호석 교우
황호석 교우가 캘거리 SAIT의 Politechnic에서 주관하고 Government of Alberta의 Youth
Technopreneurship Program 부서가 후원하는 "Accelerating Innovation " 이란 캣취프레이지
아래의 " 창업 아이디어" 선정 경연에서 영예의 1등상을 수상하여 주정부로부터 상금 2만불을 받는 것과 함께 SAIT와
법률사무소로부터 창업에 필요한 1만 2천불 상당의 법률 및 행정 지원 서비스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6월 23일 저녁 SAIT의 Heritage Room에서 SAIT 임직원 및 주정부 관계자, 그리고 많은 투자회사와
법률회사 및 경연 참가자 및 축하자들이 모인 채 "LAUNCH AWARDS CEREMONY " 가 열렸고 황호석교우가 영예의
수상을 하였습니다. (전문보기)
크림슨 광장
교우칼럼 - N.Y. 한태격
(상학 65)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원(遠, Tele-)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라곤 서신(書信), Telephone(유선전화), Telegram(전보), Telex(탤렉스)가 전부였던 시절로, 신문, 잡지를 비롯한 출판물에는 인명, 지명 등 고유명사는 “아직” 漢字(한자)로 쓰여지고 있었을 때였다.
그제나 저제나 한국의 제일 유력지로 인식되고 있는 조선일보에서 사회부 말단기자로 근무하였던 필자의 고교 선배 한 분이 일선취재 후, 마감시간에 쫓겨 경찰서 기자실전화를 이용하여 목청을 높여 송고(送稿)하던 시절, 어느 날 경찰서에 잡혀온 피의자 이름자 중에 卨(설)자가 들어 있었단다. 아무리 조선일보 기자들이라고 하여도 문교부의 일관성 없는 국어교육 때문에 한자에 취약하였던 데스크와 일선기자 사이에 卨을 전달할 수 있는 길은 “탱크처럼 생긴 그자 있잖아!”밖에 없었다.
허씨 문중에는 유독 외자이름이 많다. 홍길동전을 쓴 조선중기 문인 허균이라든가, 이승만박사 하와이 망명 후, 과도정부 내각수반을 지낸 허정, 필자의 고교동기인 허욱 등….필자가 그 분들을 생각하고 말할 때는 대나무 筠, 정사 政, 햇살미칠 旭자를 연상한다.전문보기
교우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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