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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馬故友를 떠나보내며 副題: ‘金大中’이 友情도 갈라놓았다.
03/25/2018
Posted by New York 한 태격 (상학과 65) Bt_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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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向計 第 549 )

竹馬故友를 떠나보내며

副題: ‘金大中이 友情도 갈라놓았다.

                            韓泰格

며칠 전 고교 카톡방에 [訃告]가 올라왔다. 3 14일 이병성 집사 소천 빈소 : 신촌 세브란스 장례식장 11호 발인 예배 : 317 07시 장지 : 소망교회 수양관 상주 : 이홍기- 李丙星 그는 고교, 대학이다. 그 여느 동창보다도 가까웠던 동기동창이다. 고교 때는 재학생이 480명이나 되었을 뿐아니라, 같은 반() 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다. 그는 정경(政經)대학 경제과로, 필자는 상과(商科)대학 상학과로 진학한 둘이는 대학시절 무척 가까워졌다. 왜냐하면 그 대학은 필자가 졸업한 고교출신이 극소수였기 때문에 많은 이질적인 이방인 (異邦人)’들 속에서 소외(疎外)되지 않으려면 동문끼리라도 뭉쳐야만 한다는 절박감(切迫感)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만해도 놀이문화가 거의 전무했던 60년 대, 여름이면 서울 주변 야외도 같이 다녔고 학생증을 빌려가며 도서관에서 책을 대본(貸本)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학생증 하나로 빌릴 수 있는 책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재학 3, 4 학년 2 년 간 ROTC 군사훈련 후, 육군(陸軍)소위로 임관하였고, 필자는 졸업 한 달 전 시험을 보고 해군(海軍)에 입대 3개월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소위계급장을 달았다. 그는 제대하면서 서울유수은행으로 입행하였고 필자도 졸업 전() ()을 두었던 은행으로 복직(復職)하였다.

둘이 모두 은행원이었고 서울 중심에 근무하고 있었으니 퇴근 후, 명동(明洞)에서 자주 회동했음은 물론이다. 70년 대 박정희대통령의 수출드라이브정책에 힘입어 한국경제가 전세계로 확장, 팽창해 나가고 있을 즈음, 그가 근무하던 은행도, 필자가 근무하던 은행도 유럽에 지점을 개설하거나 사무소를 개설하여 유럽으로 진출하는 종합상사를 위한 금융서비스를 하거나, 유럽금융가(金融街) London이나 Frankfurt의 금융정보를 수집하여 서울본점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둘이가 고교시절 남자학교의 제 2 외국어인 독일어(獨逸語)과목과 대학진학 후 독어원강(原講)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지자 여러 지원자를 보기좋게 물리치고필자는 Frankfurt사무소로 발령받아 떠났고 그도 Hamburg지점으로 발령받아왔다. 두 집은 먼 유럽에서도 왕래가 지속되었다. 우정(友情)은 먼 곳에서도 유지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건강이 좋지 않지 않아 중도(中途)귀국해야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Hamburg지점에 근무하기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다. 그는 젊었을때 부터 고혈압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Hamburg38도 아래인 서울보다 위도(緯度)가 훨씬 높다. Frankfurt am Main인근 북쪽 Mainz시가지에 40도 위도를 나타내는 폭넓은 동선(銅線)이 그어져있는 것을 감안하면 독일 북단의 Hamburg는 족히 50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고혈압증상이 있는 사람은 위도가 높은 지역에서 건강이상 (異狀)현상을 보인다고 했다. 그는 짐을 꾸려야만 했다. 짐을 선편으로 보낸 뒤, 사람이 움직였다.  

당시만해도 국적기가 Hamburg와 김포공항 직항로가 없어 그의 가족은 필자의 집에서 며칠 간 머문 후 Frankfurt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다.

그 후 필자는 전도(前途) 양양(陽陽) ? 장래를 접고 이민가방을 꾸려 미국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십 여개 성상(星霜)이 흐른 후, 필자가 평통위원이 되어 1997 10월 귀국하였을 때 워커힐 평통 회의 참석 후 그의 집과 필자가 머물고 있었던 여동생 집이 있는 북악산 뒤편 자하문 밖 어는 제과점에서 그를 16년 만에 해후(邂逅)하였다. 반갑고 반가워 서로는 얼싸안았다. 지난 세월 길고 긴 이야기는 찻집에서 끝낸 후 저녁시간에 되어 자리를 옮겼다. 평창동/부암동 소재 이북오도청 (以北五道廳)근처를 끼고 올라는가는 오른쪽 든덕에 위치한 어느 고급한식집에서 저녁을 하면서 선거 전() 막판을 치닫고 있는 대선 쪽으로 대화가 이어져 갔다. ‘생각도 없이필자는 이회창(李會昌) (1935년 생) 한나라당후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정색을 하며 아니야, 이번에는 김대중 선생이 당선되어야 해라고 단호하게 받아쳤다. 의견이 갈렸다. 당시만해도 좌()와 우(), 진보(進步) 와 보수(保守)라는 단어가 일반화되기 훨씬 전이다. 지금 용어로 표현한다면 그는 진보, 좌파가 되겠고, 필자는 보수, 우파가 되겠다.

물론 그는 김대중선생을 투표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그와 같은 표가 모이고 모여 김대중선생은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지지하였던 김대중대통령은 수 억불을 김정일에게 지급하고 2000 6월 평양을 방문, 최초의 남북정상회담를 성사시켰다. 알려진 금액만도 4 5천만 달러로 그 금액이 핵개발 자금으로 쓰여졌을 것이라는 것은 불보듯하다. 그 덕에 김대중대통령은 같은 해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안았다. 그러나 그 이후 좌파정부들의 대북드라이브는 독자 여러분께서 기억하고 계신 그대로이며 작년 좌파정권이 들어서면서 현재 진행형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좌파정부가 필자를 실망시키면 시킬수록 죽마고우와의 관계 또한 서울과 뉴욕거리 만큼이나 소원(疎遠) 해져갔고 멀어져만 갔다.

1997 10월 자하문 밖 그 저녁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우정도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지속되었을 텐데아니면 우정(友情)따로 이념(理念)따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편한 사고의 소유자였더라면하는  스스로 탓도 하여보건만 이제 죽마고우는 간 곳이 없다!

李兄,  미안하오..이 속좁은 사람을 용서하여주오. 편히 잠들게..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겠지. 그곳은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없을 터이니까 우리의 우정도 영원할게 아닌가?

 

Written by Ted Han on March 25, 2018    NavyOfficer86201@gmail.com    (516)773-3756

김동광 (영어영문 84, Oklahoma)

04/04/2018 21:59

많이 안타깝네요 한국출신이라면 누구나 겪고있는 아픔이 아닐까 합니다. 상대방의 사상의 자유를 서로 인정한다면 그냥 마음이 편안하겟지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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