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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Luther vs. Martin Luther King Jr. 副題: 500年 間隔을 둔 不屈의 同名異人
11/06/2017
風向計 第 537 話
Martin Luther vs. Martin Luther King Jr.
副題: 500年 間隔을 둔 不屈의 同名異人
韓 泰格(www.TedHan.com)
바로 일주일 전 10월 31일을 개신교(改新敎-Protestant Church)에서는 Martin Luther(1483~1546) 종교개혁 500주년일로 기념하였다. 한국에서 옛 종교라고 하여 구교(舊敎)로 통칭되는 로마 카톨릭(Roman Catholic Church)에 대응하여 새로운, 개혁된 종교라는 뜻으로 신교(新敎)로 불려지는 이 기독교의 종교개혁자 Martin Luther의 영향력은 설명이 필요없다. 그의 Full Name을 First Name으로 사용하고 있는 Martin Luther King Jr.목사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 흑인인권(黑人人權)운동가로, 한국인을 포함한 소수계인권신장(伸張)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거목으로 종교개혁자 Martin Luther가 500년 후 흑인으로 태어난 King목사에게 어떤 종교적 영향(影響)과 정신적영감(靈感)을 끼쳤는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래는 DW(Deutsche Welle 獨逸의 소리)가 동(同) 주제를 담아 10월 31일 자로 게재한 것을 번역하였다.
Martin Luther King Jr.목사가 Martin Luther의 이름을 First Name으로 사용하였지만, 500년 전 Martin Luther가 시공(時空)을 떠나 미국 흑인인권운동가였던 King목사에게 미친 영향은 이름이 주는 상징성(象徵性)보다 지대(至大)하다.
여러 에피소드 가운데 이런 것도 있다. 1966년 당시만해도 미국의 제 2도시였던 Chicago에서 King목사가 인권시위를 주도할 때 흑인인권개선방안을, 1517년 Martin Luther목사가 Wittenberg성채 벽에 95개 조항의 불합리(不合理)한 카톨릭교황청의 교시를 조목조목 따져 번의(飜意)하여 줄 것을 요구하는 방(榜)을 게시하였듯이, 시카고 시청 출입구에 게시하였다.
두 사람이 동명(同名)을 갖게 된 것은 실은 그 전대(前代)로 올라간다. 그때까지 Michael King으로 불리웠던 King Jr. 목사의 부친 King Sr. 목사는 1930년 대 독일 수도 Berlin에서 개최된 침례교회 목회자회의에 참석 중, 독일 종교개혁자Martin Luther에게 크게 감명(感銘)을 받게 되어 귀국한 후, 자신을 Martin Luther King Sr.로 아들을 Martin Luther King Jr.로 불러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실제 공문서에는 개명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는다. 아직도 집안에서는 Little Mike, Big Mike로 불리워지고 있다.
Martin Luther King Jr.목사는 Abraham Lincoln이라든가 Thomas Jefferson처럼 역사 속 인물들이 인용하였고 King목사 입장에서 보면 500년 전 살다간 동명이인(同名異人) Martin Luther의 명언을 원용,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極大化) 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가 Birmingham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도 그는 서한에서 Martin Luther의 명언 “Here I stand; I cannot do otherwise, so help me God.”을 가져다 썼다.
Martin Luther King목사가 Luther로 부터 받은 영향은 필설로 모두 전달할 수 없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철옹성(鐵甕城)같은 기득권에 대한 저항(抵抗)과 불굴의 용기(勇氣)였다.-Luther가 중세(中世) 누구도 범접(犯接)할 수 없는 카톨릭교권(敎權)에 대한 정의로운 투쟁(鬪爭)이었다면, King목사는 문화적, 정치적 백인기득권층에 대한 항거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Luther가 1521년 신성로마제국 (神聖로마帝國Holy Roman Empire )의 Diet of Worms* (보름스 評會)에서 이단형(異端刑)을 받고 저항하며 Worms를 떠나면서 오른 운명적인 대장정(大長征)은 1950년과 1960년 대 King목사가 인종차별철폐운동을 전개하게된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1521년(1.28.~5.26.) Luther가 Worms평회 Karl 5세 황제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용기는, 수세기동안 ‘흑인을 인간취급하지 않는 세상’을 개혁하여 보려는 King목사를 포함한 흑인인권운동가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그들은 흑인인권운동이야말로 “윤리적 진실(Ethical Truth)”일 뿐아니라, “주님의 뜻(The Word of Lord)”이라고 생각했다.
두 거목은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고 기득권과의 투쟁은 평화적으로 전개되어져야한다고 믿고 있었다.
두 거목의 차이는 Luther는 종교개혁만을 주제로 삼았다는 점이 King목사와는 다른 점이다. Luther는 핍박받는 소농(小農)이라든가 인종차별을 받는 유태인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 주어야한다는 인식은 없었다.Luther의 입장에서는 종교분야를 떠나 다른 분야에서까지 기득권층의 권위(Obrigskeit**)과 충돌은 심적 부담이 컸을런지모른다.
Luther가 하늘에서 500년 후배인 King목사가 자기이름을 쓰면서 용감하게 기득권층에 저항하며 정의사회구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에 깊이 감사해 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두 사람 다른 점이 있다면 시대적으로 다른 세상에 태어나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변혁시켰다는 점이다.
Luther는 카톨릭교권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시대, 인간의 사고의 틀을 변혁시켰다는 점이고 King목사는 그 짧은 기간내에 미국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1950년이나 1960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얼굴로 변모시켜놓았다.
*사진
**(獨語) 權威, Authority
關聯칼럼; 뉴욕일보 풍향계 2011.12.23. 자 King James 聖經(1611年 發刊)의 歷史와 그 兩面性
蛇足: Martin Luther와 동(同)시대를 살았던 르네상스의 대가(大家)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展이 뉴욕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다음 주 11월 13일부터 내년 2월 12일까지 개최된다. 중세 말 “인간선언”을 한 두 거목(巨木)을 함께 이해할 수 절호(絶好)의 기회겠다.
Written by Ted Han on November 6, 2017 NavyOfficer86201@gmail.com (516)773-3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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