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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戰爭 勃發 150週年
04/10/2011
南北戰爭 勃發 150週年 逢南 韓 泰格(www.TedHan.com) 6.25동란(動亂)을 거론하지 않고 한반도(韓半島)의 현대사를 논할 수 없듯이, 남북(南北)전쟁을 노정(露呈)시키지 않고 미국근대사를 말할 수 없다. 4월12일은 남북전쟁이 일어난 지 1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쟁은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 Fort Sumter에서 남군에 의한 공격으로 1861년 4월12일 시작되었고, 1865년 4월9일 버지니아 주 Appomattox에서 남군 Robert E. Lee 장군의 항복으로 종식되었다. 노예(奴隸 Slavery)제도를 유지하려는, 일반적으로 The Confederacy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로 불리는 남부 11개 주(州)가 노예제도를 철폐한 20개 북부 주와 남북 경계선상에 위치하면서, 노예제도를 유지하려는 5개 주(Border States)로 구성된 미연방(The United States)으로부터 이탈(離脫),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촉발(觸發)된 전쟁이었다. Union으로 불리는 북부 25개 주는, 인구 수와 산업 구조 면에서, 남부 Confederacy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4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Civil War)으로 생명을 잃은 전사자(戰死者)의 수는, 미국이 개입하였던 모든 전쟁희생자를 합한 수보다도 많은 62만 명에 달했다. Confederacy(남군)의 항복으로, Union(북군)의 가치(價値)인 노예제도가 철폐되었으며, 전후 재건(再建)캠페인이 전개되었지만, 남북간의 갈등치유(葛藤治癒)는 수세대가 소요되었다. 1860년 대통령선거 캠페인에서, 아브라함 링컨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남부 주들이 주장하는 노예제 연장 안에 반대한다는 공약을 천명하였고, 국가분리주의자들을 반역자(反逆者)로, 다스릴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하기로 예정된 1861년 3월4일 이전, 이미 목화(木花)를 재배하는 7개 주는 이탈을 선언,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국(國)에 참여하였다. 퇴임하는 15대 대통령 James Buchanan행정부와 새로 입성하는 신행정부는 이들 분리주의자들을 “반도(反徒, Rebellion)”로 규정하였다. 세계 어느 나라도 남부 Confederacy정부를 합법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남군이 1861년 4월12일 South Carolina Fort Sumter 군사시설을 공격하고, 이에 대하여 북군을 지휘하는 링컨대통령이 연방정부재산을 확보하기 위하여 의용군을 모병(募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노예제도에 찬성하는 4개 주가 더 이탈에 동참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양측이 남북 경계에 있는 주를 장악하기 위하여 군을 증강시켰고, 급기야는 북군이 남부주의 자금원(資金源)인 면화판매를 중지시키기 위하여 항구를 봉쇄하기에 이른다. 1861~1862년 지상전은 북군이 워싱턴, 리취몬드, 버지니아 등지를 재탈환하기 위한 작전에 남군이 반격을 가하는 바람에 전선은 밀고, 당기는 형국이었다. 1862년 9월 링컨의 노예해방선언(奴隸解放宣言-Emancipation Proclamation)은 이 전쟁의 목적이 노예해방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따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식민시대 종주국이었던 영국이 내란에 개입(介入)하는 것을 막았다. 남부 Robert E. Lee 장군이 버지니아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1863년 Gettysburg 전투패배로 북쪽 지역으로의 진군(進軍)은 좌절되었고, 서부전선 역시 북군이 Mississippi 강 유역을 장악, 남군은 지역적으로 양분(兩分)되게 되었다. 북군의 Ulysses S. Grant 장군이 Lee장군과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북군 William Tecumseh Sherman 장군이 Atlanta를 지나 해안지역 까지 장악하게 됨에 따라, 남군의 저항은 Lee장군이 1865년 4월 9일 Appomattox 법원건물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4년간의 기나긴 전쟁은 막을 내렸다. 남북전쟁은 산업혁명 초기(初期)전쟁으로 기록된다. 철도, 전신(電信), 증기선(蒸汽船) 그리고 대량생산(Mass Production)된 무기 등이 광범위하게 이용되었으며, Sherman 장군이 개발한 전면전(Total War)개념이 도입되었고, 세계 1 차 대전 때 크게 이용되었던 갱(坑)을 이용한 전투가 Petersburg 인근에서 전개되었다. 이렇듯 “과학전(科學戰)”이었기 때문에 62만 명이라는 엄청난 생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현재 미국전체인구의 3명중 2명의 조상(祖上)들이 참여하고 관여한 남북전쟁의 희생자는 20~45세까지의 북부인구 10%가, 18~40세까지의 남부 백인인구 30%가 목숨을 잃었다. 북군의 승리는 미주에서 남부 Confederacy 정권을 종식시켰고 노예제도의 철폐를 공식화 하였으며 연방정부의 역할을 강화시켰다.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인종적으로 갈등을 빗고, 파괴된 여러 분야에서 1877년까지 재건 및 치유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흑인에 대한 차별이 상존하는 것처럼, “북과 남”은 현존하고 있다. 6.25도, 남북 전쟁도 성장통(成長痛 Growing Pains)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상처”였다. Written by Ted Han on April 10, 2011 NavyOfficer86201@yahoo.com (718)63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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