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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동학(東學) 과 고려대 - 연관관계를 아십니까?
06/09/2011
Posted by Los Angeles 김성철 (경영 58) Bt_email

동학(東學) 과 고려대 

 

 

      보성전문이 한동안 3.1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 의암 손병희선생이 이끄는 천도교에 의해 운영 되었었다는 사었실쯤은 고대 출신들에게는 당연한 역사 상식이지만, 이 상식의 깊이는 대개가 손병희선생의 이름을 아는정도를 넘지 못 하는것 같다. 

 

      좀더 자세히 역사기록을 뒤져 살펴보면 보성전문은 1910년에서 부터 1932까지 손병희 선생의 주도하에 천도교(天道敎)교단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그운영을 맡았거나 관여하였다는 사실이 파악된다. 1932년 인촌 김성수 선생이 그 운영을 인수 할때까지 20여년간으로 파악 된다.

 

       그런데 그 천도교가 바로 동학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 사람은 더구나 많지를  않은것 같다. 손병희선생이 동학의 제3대교주가 되면서 교단의 명칭이 천도교로 변경 되었는데 그후 동학이라는 명칭이 잊혀지면서 생긴 혼선인것 같다.

 

       이렇게 천도교가 곧 동학이라면 고대는 동학과 상당한 역사적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민족 고대의 뿌리와 근본을 이해하는데는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되고, 그와의 연결 고리를  살펴 보는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서 여기저기 뒤져 동학에 관한것 그리고 고려대와 관련된 역사를 대강 추려보았다.

 

동학란(東學亂)과 그 영향을 살펴보면

 

      조선조 말기 고종(高宗) 때인 1894년에 부패한 관료들의 횡포에 항거 하여 농민들이 일으킨 동학난에 대하여 배운 기억이 있을거다.  쇠퇴의 길로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조선조는 여러면에서 제도의 노후화에 따른 권력의 남용과 부패가 만연하는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시기의 1860년 철종(哲宗)때 경상도에서 민족종교로 시작된 동학은 그시대의 피지배층인 농민들의 정서에 맞아 들어가면서 영남지역뿐만 아니라  호남, 충청 , 황해도 및 평안도 까지 그 교세가 퍼지며 한때는 신도수가 4백만에 달 했다고 한다.

 

청년기  김구선생도  동학접주

 

  1894년 탐관오리의 억압과 착취에 항거 하여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을 믿는 농민들이 전봉준의 주도하에 민란을 일으켰다. 부패척결과 倭와 洋의 외세배격 등의 기치를 들고 봉기는 삽시간에 전국적인 호응을 받으며 퍼져서 서울로 방향을 잡아 조정을 위협하였고, 황해도 와 평안도에서도 봉기가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셨던 백범 김구 선생도 청년기인 이때에 황해도 동학 접주가 되어 동학봉기에 압장 섰었다고 백범일대기는  기록하고 있다.  

 

동학난은 청일 (淸日) 전쟁 과 로일(露日)전쟁 의 발단이 되었고,  

이로써 청나라와 제정러시아 붕괴의 시작이 되었다

 

       관군의 힘으로 봉기를 막을수 없다고 판단한 조정은 청() 나라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 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본 일본은 청나라의 조선 내정 개입을 용납할 수 없다 하며 군대를 조선에 맞 파견 하여 드디어 근대사의 하나의 큰 획이 된 청일 전쟁이 한 반도에서 벌어졌다.  외세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동학농민봉기는 왕조를 바꾸기에 충분하였을거라는 주장이 이래서 나온것 같다.

 

        결국 동학난은 진압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청일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힘을 잃어 쇠태의 길을 가며 붕궤 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승자인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는 시작이 되었다.  이 봉기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아관파천 등의 사건등으로 이어지며 국운은 점점 기울어 일본의 압박을 막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지배를 놓고  1904년에 러시아와 또 한판 붙어 노일전쟁을 이르켰다.  여기에서도 승리한 일본은 세계열강의 간섭 없이 한국을 점령 할수 있었고 만주로 진출 하였다,  러시와 일본의 강화조약을 주선한 미국의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1906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제정 러시아는 여기에서 부터 국력의 쇠퇴가 시작되었는데, 거기에다 세계1차 대전의 소모전이 더하여 결국  볼쉐빅 붉은 혁명이 일어 났을때 이를 진압 하지 못하고,  그 오랜 역사의 帝政이 붕괴하여 1917년에  막을 내리고  공산화 되는 일이 생겼다.  

 

 

동학의 敎主들은 누구였나

이렇게 근대세계역사의 큰틀을 바꾸는 한 발단이 되었던 동학을 이끈 수장들은  과연 누구였던가를 살펴보지 않을수 없다.

1대 교주 최제우: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경상도에서 창시한 종교인데, 유교와 불교가 퇴색한데다  서양종교까지 몰려 오면서 사회가 혼미속에 있을때, 새롭게 유교, 불교, 선도의 교리를 아우르며 바탕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으로 교리를  집대성 하였다.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인내천 사상은 만민 평등을 주장하는 바탕으로  그당시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의 횡포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농민들의 정서에 쉽게 접목되었으며, 후일 전봉준이 이끈 동학란의 이념이 되었다. 

최제우는 철종때인 1864년에 혹세무민죄로 잡혀 처형 당하였다.

2대 최시형:  최제우가 처형된후 최시형이 제2대 교주가되었는데 이때에 전봉준의 주도하에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난것이다.  최시형은 이에 합세하여 관군과 일본의 연합군과 싸우다 체포되어1900년에 사형당하였는데, 후에 순종황제에 의해 사면되었다.  

3대 손병희:   최시형이 처형되자 농민봉기에 가담하여 관군 일본군과 싸우던 동학군의 접주중의 한사람이었던 손병희가  3대 교주가 되었다.  교주가 되자 그는 동학의 내부를 정리 개혁 하고 교단명칭을 천도교로 바꿨다.  내부분열도 있었지만, 손병희는 동학을 관군과 싸우며 쫓기는 저항집단에서 합법적인  종교교단으로 탈 바꿈 시키기는데 성공하였다.  손병희는 후에 3.1운동시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그 운동을 주도 하였고,  3.1운동때 민족 대표 33인중 상당수가 천도교 교인이었던 사실이 시사하듯 천도교를 항일 운동의 한 주축으로 이끌었다.

천도교가 보성전문의 운영을 맡고 손병희선생이 경영책임자가 되어

 

보성전문의 시작은 왕립대학?

        국운이 이렇듯 기울고 있는 시기인1905년 충숙공 이용익 (李容翊) 선생이  고종황제의 재정적 후원으로 보성(普成)"이라는 교명(校名)과 황실 문장인 "이화문(李花紋)"을 교표(校表)로 하사받고 사재를 보태 보성전문을 설립하였다고 한다. 이렇다면, 이는 근대한국의 최초의 대학이며 1915년 당시 경신학당(현 경신중고등학교)의 대학부로 시작된 연희전문 보다 10년이 먼저이다. 이렇게 보면 고대는 근대조선 최초의 왕립대학으로 출범하였다고도 볼수 있다.

 

한일합방이 되고 그 해에서 부터

       보성의 천도교와의 인연은 나라가 일본에 합방되면서 이용익 선생이 불라디보스톡으로 망명 사망함으로 인하여 학교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부터이다. 1910년인 이때 부터 천도교가 교육구국의 목표를 세우며 학교 운영을 맡게 되면서 동학의 3대교주 손병희선생이 학교경영책임자가 된것이다.

 

        나라가 망하여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시기에 천도교 교인들은 그들의 종교의식의 하나로 밥을 지을때마다 식구당 쌀 한숫가락씩을 따로 떼어 놓으며 모으는 소위 성미 (誠米 )를 모아 교단에 바쳤는데, 보성전문의 운영이  장기간  이 성미의 지원을 받아 운영된것이다. 이용익선생이 함께 세운 보성중고등학교도 이때 함께 천도교가 운영을 맡았었다.   3.1운동직후 손병희선생이 일본에 의해 체포감금되면서 학교운영이 어려워 지는 가운데서도 천도교의 지원은 계속 되었다.

 

      1922년 학교 교사를 원동에서 송현동 소재 구 천도교 총부로 이전 하여  1933년에 김성수 선생이 새로지은 안암동 새교사로 옮기기 까지 천도교 건물이 학교교사였던 사실도 고대와 천도교와의 인연을 설명 하여 주고 있다. 1930년 세계경제공황으로 인한 학교운영난이 김성수선생의 경영인수로 해결되는 시점을 끝으로 천도교와의 20여년간의 인연이 마감 되었다지만 지금도 천도교 교단에서는 자기네가 한때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을 운영하였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 같다..

 

 

고려대역사 배경에서의 동학의 그림자는 크다

 

       2011년이 동학이 일어난지 152년 동학농민봉기 116년이 된다고 하는데 이 동학은 분명 우리 근대사의 큰 장(Chapter)을 이루고 있음이 틀림이 없으며, 이러한 동학과 연관하여 고려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대학교의 뿌리는 동학과의 연결을 부정 할수 없어 보인다. 그시기에 동학란이란 전국규모의 혁명을 일으켜 조선왕조의 존립을 위협하며 청일 전쟁을 일으킨 발단을 제공 하였으며, 이로써 근대세계사를 바꾼  그엄청난 사건의 주체였던 동학과, 이를 이끌던 수장중의 한사람이었던 손병희선생과의 연관, 그것은 분명히 우리학교역사의 배경을 크게 그리는 바탕임에 틀림 없을것이다. 

 

      고려대는 대한제국에서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해방과 남북분단, 6.25전쟁, 4.19혁명등 수많은 국난기를 거치면서 민족대학110년역사를 자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동학과의 관계사는 그대로 그역사의 뒷전에 묻혀 잊혀지고 있는것 같다.

 

       조선 황실의 충신으로 일본을 막으려 노력 하였던 이용익 선생에서, 동학의 교주 손병희선생 그가 민족대표로 이끈 3.1 운동, 그리고 김성수 선생으로 이어지는 민족지도자들과 조직이 고려대학교를 민족대학으로 만든 역사의 큰 틀인데, 이엄청난 역사의 배경에는 동학의 그림자는 대단히 커 보인다.

 

       일제시 항일 운동을 위시하여 4.19 혁명에 앞장서면서  독재에 항거하고 끊임없이 정의를 외치는 그 저항의 전통은 우연히 발생 한것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인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 해 본다.

 

 

 

                                                                                     김성철 (경영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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