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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年 前 그리고 後
04/17/2011
Posted by New York 한 태격 (상학과 65) Bt_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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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年 前 그리고 後

 

                              逢南  韓 泰格 (www.TedHan.com)

 

145년 전 프랑스 함대가 약탈(掠奪)”하여간 강화도 외규장각(外奎章閣) 도서 340권중 1차 반환 분인 75권이 4 14일 고국 땅으로 귀환(歸還)하였다. 역사적인 사안(事案)이 아닐 수 없겠다.

 

우리는 약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조선과 프랑스 양국간 전쟁행위의 일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양국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시대상황과 국제관계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45년 전이라면 1866(병인년-丙寅年)이다. 조선조(朝鮮朝) 26대 고종(高宗) 3년으로 생부(生父)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52년 생()인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攝政)하고 있을 때였다.

 

대원군은 국내적으로는 유교(儒敎)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專制)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개항(開港)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西歐列强)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외(斥外)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書院)을 철폐하여 양반, 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老論)의 일당독재를 타파하고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철종(재위 1849~1863)은 천주교에 대하여 관대하여 베르뇌 주교, 리텔 신부등의 프랑스인 선교사가 많이 들어와 전교(傳敎)에 힘썼으므로 1861(철종 12)에는 천주교도인의 수가 18천명, 1865(고종 2)에는 2 3천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한편 1864(고종 1) 러시아인들이 함경도의 경흥부에 방문해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런 갑작스러운 요구에 조선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당시 조선에 선교를 목적으로 방문 중이던 천주교 선교사들이 조선 정부가 프랑스, 영국과의 동맹을 체결한다면 프랑스의 나폴레옹 3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 측의 통상요구 시일이 지나면서 조선 정부는 안심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이 제안했던 삼국 동맹도 무산된다. 또한 동맹 제안에 대해 무책임한 주선으로 간주하며 선교사들을 지탄하였다. 그러던 차에 흥선대원군의 처소인 운현궁에 천주교도들이 드나든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대왕대비 조씨와 정부 관료들이 천주교도들의 행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단행한다.

1866(고종 3) 정월에 전국에 천주교 탄압령이 내려지면서 대대적인 피 바람이 불게 되었다. 남종삼·정의배(丁義培) 등 조선의 천주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되었고, 당시 조선에 머무르고 있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된다.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3명 중 하나였던 리델 신부는 탈출에 성공하여 톈진에 있던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함대(극동함대(極東艦隊))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고 받은 북경프랑스 대리공사(代理公使) 벨로네 (Bellonet)청나라에 공문을 보내 항의하며 조선 정벌의 결의를 표명했다. 하지만 청나라 측은 “조선은 비록 청의 속국이긴 하지만 예로부터 내정과 외교는 자치적으로 행해 왔다.”라는 내용을 담은 답신을 보내, 사건이 청나라와는 무관함과 향후 이에 대해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청나라 정부는 간섭할 수 없음을 프랑스 공사관 측에 통고했다. 한편 청나라를 통하여 프랑스의 침략 의사를 전해들은 대원군은 탄압을 더 심하게 하는 한편 변경의 방비를 더 굳게 하였다.

1866 음력 9로즈 제독이 인솔하는 프랑스 군함 3척이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오늘날의 인천 앞바다에 다다랐다. 음력 9월 11(양력 10월 18) 순무영에서 프랑스 함대에 격문을 보내니 회답 격문이 왔다. 그에 따르면 선교사가 죄 없이 죽었으므로 때문에 왔다고 주장하면서, 죽은 프랑스 천주교회 선교사 9명에 갈음하여 조선인 9천 명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1866 음력 9월 18(양력 10월 25) 한성부(서울) 근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 일대에 진출했다. 이로 인해 서울 도성은 공포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급히 어영대장 이용희를 파견하여 한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였다. 프랑스 함대에서는 3척의 소()함대로써 도성의 공격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음력 9월 25청나라로 물러났다.

조선 정부는 더욱 군비를 갖추고 한강 일대의 경비를 엄하게 하였다. 그 해 음력 10월 11 로즈 제독은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7척의 군함과 일본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300명을 포함한, 도합 1230여 명 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다시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勿淄島) 근처로 진출하였다.

음력 10월 14에는 프랑스 함정 4척과 해병대의 일부가 강화도의 갑곶진(甲串鎭) 부근의 고지를 점령한 뒤 한강의 수로를 봉쇄했다. 이어 16에는 프랑스군의 전군이 동원되어 강화성을 공략해 점령하고 여러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이경하(李景夏)·이기조(李基祖)·이용희·이원희(李元熙) 등의 장수들을 급히 양회진·통진(通津)·광성진(廣城津)·부평(富平)·제물포 등의 여러 요소와, 문수산성·정족산성 등지에 파견하여 도성 수비를 강화하면서 19에는 프랑스 측에 공문을 보내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로즈 제독은 조선 측의 선교사 처형 등의 천주교 탄압행위를 비난하면서 전권대신의 파견을 요구했다.

음력 10월 26에는 120여 명의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다가 매복 중이던 한성근(韓聖根) 등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음력 11월 7 프랑스군은 다시 교동부(喬桐府)의 경기수영(京畿水營)을 포격하고, 앞서 강화부를 점령한 일대 160여 명의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의 공략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매복 중이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 및 사격에 능한 500여 명의 조선군 포수들의 공격을 받아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으면서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이에 놀란 프랑스군은 장녕전(長寧殿)을 위시한 여러 관아(官衙)를 불사르고 갑곶진으로 퇴각했다.

로즈 제독은 이 이상의 교전이 불리함을 깨닫고 음력 11월 18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고, 성내의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약탈한 은괴와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청나라로 철군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일로 자신감을 가진 대원군은 기존에 고수하고 있었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병인양요는 두 달 만에 끝났지만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귀중도서와 은괴 19상자 등을 약탈당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동양에서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제국의 위신은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한편 유럽 열강은 조선의 국제적 위치와 조선-청나라 관계에 대하여 재검토하게 되었고, 그들이 탈취해 간 많은 서적과 자료는 후일 유럽 인사들의 한국과 동양 연구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약탈 도서가 고국 땅으로 돌아 오던 날과 그 다음날(14~15양일) 미국 워싱턴에서는 G20 (주요 국가)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 회의가 개최되고 있었다. 이 회의는 올 가을 프랑스 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를 위한 주요 의제 진행경과를 점검하고 추가 논의를 위한 지침을 마련하는 성격의 회의였다.

이 회의를 취재한 월 스트리트 저널(WJS)은 주말(16.17)판 신문에서 G20 Sets Plan on Imbalances. (G20 불균형평가계획채택)이라는 제목의 G20 회의 결산 기사를 게재하면서 필자의 고교동창이기도 한, 한국의 尹增鉉(윤증현)기획재정부장관이 G20 차기 의장국 재무장관인 프랑스 Christine Lagarde 장관과 IMF Dominique Strauss-Kahn 총재가 담소하는 사진을 경제란 머리기사로 올려 놓았다.

병인(丙寅)년에 서양인(西洋人)들이 일으킨 소요(騷擾)라고 하여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불리는 조불(朝佛)전쟁이 발발하였던1866년 이후, 조선은 망국(亡國)의 길로 치달았으며, 그 후 한반도는 한민족이 주역 (主役)은 아니었다. 주인이로되 객()이었던 셈이다. 145년 중 적어도 한세기는 잃어 버린 세월이었던 것이다.

약탈된 외규장각도서가 145년 만에 귀환 하던 날, 대한민국 장관이 제국주의 시대 영국과 함께 세상을 지배하였던 구주 열강의 한 축인 프랑스 재무장관 그리고 세계경제정책을 총괄하는 IMF 총재와 함께 미소 지으며 찍은 사진이 오늘의 대한민국과 한민족(韓民族)의 국제적 위상(位相)을 대변하여 주는 듯하여 벅찬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망실(亡失)된 시간을 만회(挽回)시킨 분들의 희생(犧牲)에 존경과 경의(敬意)를 표합니다.

Written by Ted Han on April 17, 2011  NavyOfficer86201@yahoo.com  (718)63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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