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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팽창정책(膨脹政策)의 좌절(挫折): 크리미아(Crimea)전쟁(戰爭)
03/09/2014
러시아 팽창정책(膨脹政策)의 좌절(挫折): 크리미아(Crimea)전쟁(戰爭)
逢 南 韓 泰格(www.Tedhan.com)
흑해(黑海)연안 동부휴양도시에서 인류의 축제 올림픽이 폐막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개최지 Sochi로 부터300마일도 채 안되는 곳에서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다. 우크라이나(Ukraine) 크리미아(Crimea)반도로 러시아 군(軍) 15,000명이 진군(進軍)하였고, 모스코바에서는 전략의 요충지(要衝地) 크리미아반도를 합병(合倂Annexation)할 모색중이라고 알려져 서방(西方)과의 긴장(緊張)이 점중(漸增)되고 있고,급기야 양 세력간 충돌(衝突)할런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팽배(澎湃)해 있다.
이 시점에서 지난 수세기동안 열강(列强)의 각축장(角逐場)이었던 크리미아 반도에 관하여 일별(一瞥) 하여 보는 것도 현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사료된다.
크리미아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19세기중엽 발발(勃發)하였던 크리미아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전쟁의 승패(勝敗)가 어떤 결과를 야기(惹起)시켰는지 고찰하여 보자.
1853년(朝鮮朝 哲宗4年에 해당)부터 1856년까지 2년5개월간 지속된 크리미아전쟁은 결과적으로 러시아가 불란서, 영국, 오토만제국, 사르디니아 연합군에게 패한 전쟁이다.
외관적으로는 700~800년전 십자군전쟁처럼 일종의 종교(宗敎)전쟁 양상(樣相)을 띄고 있었다. 모슬램국가인 Ottoman제국이 지배하고 있는 성지(聖地)내 예수교도들이나, 카토릭신자 그리고 정교회(正敎會-Orthodox)교도들의 권리를 확보하여 주겠다는 명분(名分)이 있었으나, 실제론 영국과 불란서가 “기울어져 가는 오토만제국”의 영토로 남하(南下)하는 러시아제국를 견제(牽制)하려 했던 전쟁이다.
전투는 주로 흑해상 해전(海戰)으로, 육지에서는 크리미아반도에서 전개되었다. 전쟁은 연합국측 350,000명(불란서 95,000, 영국 22,000, 오토만제국 150,000 이상), 러시아측 220,000명의 전사자(戰死者)를 내고, 오스트리아의 중재(仲裁)로 1856년 2월 종식(終熄)되었다.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러시아의 패전으로 흑해는 중립화되었고, 러시아는 흑해에 군함 한 척(隻)도 보유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1815년Waterloo전투 패전이후처럼 국경(國境)도 새로 그어지거나 새로운 나라도 탄생(誕生)하게 되었다. Wallachia-왈라키아-공국(1861년 루마니아로 합병됨)과 Moldavia가 오토만제국으로 부터 독립하게 되었고, Ukraine, Bulgaria, Romania, Azerbaijan, Armenia, Georgia 같은 나라가 새로 탄생하게 되었다.
전투로 인하여, 인구의 이동으로 인하여 그리고 전쟁으로 야기된 민족주의운동 등으로 인하여 하나의 전쟁 “크리미아 전쟁”이 동(東)유럽의 지도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크리미아 전쟁은 양측 모두 군수(軍需), 의료(醫療) 그리고 전술상 미급(未及)으로 인하여 상상(想像)을 초월한 피해를 감수(甘受)해야 했던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연합국의 승리으로 인하여, 전쟁을 주도(主導)하였던 불란서가 19세기에 치른 전쟁중 처음으로 승리로 이끈 전쟁으로 기록되어 보나빠르트 나뽈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3세 황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해전(海戰)에서는 영국해군(Royal Navy)이 러시아 흑해함대를 전멸(全滅)시켰을 뿐 아니라, 발틱해를 봉쇄(封鎖)하여 러시아 함대가 북해로 “얼씬 거리지” 못하게 하는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크리미아 전쟁은 첫번째 “현대전(現代戰)”으로 기록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철도(Railroad)라는 운송시설이 이용되었고, 최초로 전보(Telegraph)하는 통신방법이 사용되었던 전쟁이다.
인류애를 구현한Nurse의 대명사Florence Nightingale과 Mary Seacole이 이 전쟁에서 “탄생”하였으며, 전투장면를 사진기(寫眞器)에 담은 첫번째 전쟁이다. 러시아의 문호(文豪) Leo Tolstoy (1828.9.9.~1910.11.20.)가 26세의 나이로 육군장교로 참전한 전쟁이기도 하다.
한 전쟁이 수 많은 결과를 초래(招來)시키거나, 야기(惹起)시켰다.
역사는 우리들의 Mentor다.
Tsar-황제(皇帝)-라고 불리우는 푸틴(Putin)대통령의 러시아 신(新)팽창, 모험주의가 이웃나라들에게 고통(苦痛)을 안겨 주지 않기를 바라며, 160여년전 500년 사직(社稷)이 저물어 가는 철종 년대를 여행하여 보았다…
(*) 나뽈레옹3세 황제 재위시 조선과의 관계
병인양요(丙寅洋擾[1] )는 1866년(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병인박해)을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명분으로 하여 불란서가 일으킨 제국주의적인 전쟁이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해병대 1,230명 승선)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불란서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불란서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불란서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Written by Ted Han on March 9, 2014 NavyOfficer86201@gmail.com (718)63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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