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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이끌어 내지 못했다!
09/01/2014
그들이 해냈다!
副題: 鐵道高等學校 同窓會/救命委員會 萬萬歲
逢 南 韓 泰格(www.TedHan.com)
선친(先親)께서 법제처(法制處)에서 유진오(兪鎭午)박사를 모시고 계셨을 때의 이야기다. 선친을 포함하여 7~8명의 법제관(法制官)들이 2~3개의 부처를 윤번제(輪番制)로 배당받아 행정부(行政府)가 필요로 하는 법안을 기안(起案)하여 국회(國會)로 송부(送付)하는 일을 하셨다. 한 때는 교통부, 체신부를 담당하셨다. 부친서재에는 ‘누런’갱지에 상(像)도 선명(鮮明)하지 않은, 흑백사진이 곁들인 교통부발행 철도관련잡지가 꽂혀 있었고, 벽에는 새하얀 최고급 켄트지에 전세계 아름다운 자연경관(自然景觀)이 담긴 총천연색 사진이 특수인쇄된, 당시 세계 최고의 항공사 Pan-Am이나 TWA의 켈린더가 걸려 있었다. 책상위에는 소형 여객기모형도 놓여져 있었다. 그런 자료와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기차는 왜 속력(速力)이 느릴까, 유럽기차들처럼 유선형으로 설계되어 있지 못할까? 한걸음 더 나아가 난 언제쯤 저토록 아름다운 곳을 여행하여 볼 수 있을까라는 꿈을 키웠었다.
당시는 Infrastructure를 사회간접자본(社會間接資本)이라고 번역하기 훨씬 전 시대(時代)다. 아마도 국가기간 (基幹)산업이라는 순수(純粹) 우리 단어로도 의사가 100% 전달될 수 있었던 시대였었다. 6.25 동란이후, 철도교통망구축(構築), 통신망 가설(架設)등이 국가시책(施策)의 최우선의 과제였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철도고등학교와 체신고등학교 출신들이 산업역군(産業役軍)이 되어, 경제개발에 크게 공헌(貢獻)을 하였다. 그들의 기여도(寄與度)는 괄목(刮目)할만한 것이었다. 체신고등학교는 혁명정부의 정책적 착오로 1962년 폐교(閉校)의 비운(悲運)을 맞았지만, 철도고등학교는 1999년 국립한국철도대학으로 승격(昇格), 현재에 이른다. 철도고등학교는 일반 고교 입시일(入試日)보다 한 달이나 이른 특차(特次)였으며 학비도 국가에서 지급하여 학비부담이 여의치 못했던 집안의 수제(秀才)들이 모여든 학교였다. 어려웠던 시절 철도고등학교의 경쟁률은 서울 3대 명문교를 앞지를 정도여서, 그들의 애교심(愛校心), 자부심(自負心)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따라서 비슷한 집안. 같은 처지, 상황에 놓인 학생들이었으니 서로의 동질감(同質感)은 동기(同期)간, 선후배(先後輩)간 사이에 ‘깊은 관심’과 ‘뜨거운 애정’으로 승화(昇華)될 수 있었다.
그런 교풍(校風)속에서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철도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이국만리(異國萬里) 미주(美洲)에서 드디어 빛을 발했다!
다음은 지난 주 도하(都下) 일간지에 대서특필(大書特筆)기사다.
“2014년 8월23일, 1989년7월29일 방화(放火)로 친딸을 살해하였다는 혐의로 “가석방 (假釋放, Parole)없는 종신형(終身刑)”을 선고받고 복역(服役)중인 이한탁(79)씨가 가석방되었다.”
1989년 사건직후, 철도고등학교출신을 중심으로 구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그로부터 25년이란 장(長)기간동안 이한탁(철도고등학교 1954졸업,연세대 졸)씨의 무고(無辜)함을 주장, 구명운동에 매진(邁進)하였다.
25년간 7번의 항고(抗告)를 추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아니라, 기나긴 세월 생업을 마다하고 뉴욕에서 펜실바니아 주 Houtzdale형무소까지 왕복 8시간이상 소요되는 거리를 다니며 옥바라지한 철도고등학교 동문들과 구명위원회의 ‘피나는’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다!
수수방관(袖手傍觀)하였으면 그곳에서 저승사자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25년이란 세월은 인간 수명(壽命)의 1/3 이나 되는 기~인 세월이다. 가족조차 감당(堪當)하기 어려운 일을 동문회에서,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하나의 이유’로 25년간 옥바라지하였다. 중범(重犯)들만 수감되어 있는 연방형무소. 살해의 위험까지 도사리고있는 영어(囹圄)의 상황속에서 희망의 ‘끈’을 잃지 않도록 생명의 ‘끈’을 잡아준 동문회의 헌신적(獻身的) 봉사(奉仕)와 ‘살인적(殺人的)’ 인내(忍耐)는 필자의 필력(筆力)으로는 서술(敍述)이 불가능하다!
타의 추종(追從)을 불허(不許)하는 결집력(結集力), 응집력(凝集力)으로 뭉친 국립철도고등학교 출신들 아니고서는 만들어낼 수없는 ‘기적(奇蹟)’이었다!!!!
철도교등학교 동창여러분, 존경(尊敬)하는 구명위원회 여러분 국내외 모든 것들이 사분오열(四分五裂)되는 ‘판국’에, 역사에 길이 남을 큰 교훈(敎訓)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후진(後進)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 귀감(龜鑑)을 ‘만들어’ 내셨습니다…훌륭하십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구명위원회의 재정난으로 수임료를 지급할 수 없는 입장을 이해하고 무료변호(無料辯護)를 자청, 지난해 항소심에서 검찰측이 제시한 증거들의 오류(誤謬)를 제시, 이한탁씨의 석방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Peter Goldberger변호사에게 고마움을 금할 수 없다….
필자의 미국인 지인가운데, Eddie D. 이라는 친구가 있다. 첫 인상을 보면 “뻐꾸기 둥지위를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영화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그가 잘 나가던 때 뉴저지주(州) 한인들도 많이 거주하는 모(某)시(市)의 부사장(Deputy Mayor)재직중 수뢰(受賂)사건에 연루되어 5년동안 ‘어려운 곳’에서 복역하였다고 했다. 그의 증언이다. TV Channel을 허락없이 바꾸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살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目擊)하였다고 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한마디로 자유가 없는 곳은 극한(極限)상황의 연속이다.
그러한 극한 상황을 극복(克服)하시고, 견딜 수 없는 분노(憤怒)를 25년이란 긴 세월 현명하게 억제(抑制), 관리(管理)하시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랑스러운 국립철도고등학교 동창들 곁으로, 저희 들 옆으로 “무사히 생환(生還)”하여 주신 이한탁선생님!!! 정말 존경(尊敬)스럽습니다.
억울(抑鬱)하게 ‘사라진’ 25년이었습니다.
선생께서 어려운 곳에 계셨던 그 긴 세월 바깥 세상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천박(賤薄)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분노를 여과없이 분출하는, 절제(節制) 못하는, 인내(忍耐)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후진들에게 감정을, 분노를 자제(自制)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선생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현재 우리사회가 절실하게 요구하는 인성(人性)교육의 좋은 소재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작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덕목(德目) 입니다. 선생께서도 많은 보람을 느끼실 것입니다. 행복하십시요! 만수무강(萬壽無疆)하십시요.
Written by Ted Han on Aug 31, 2014 NavyOfficer86201@gmail.com (718)63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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