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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s(宗敎的, 道德的 罪惡)에 대한 謝罪
07/12/2015
Posted by New York 한 태격 (상학과 65) Bt_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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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s(宗敎的, 道德的 罪惡)에 대한 謝罪

副題: Francis敎皇 南美 3個 貧國 訪問을 契機로….

逢 南 韓 泰格(www.TedHan.com)

Francis교황이 지난 6일부터12일까지 일주일간 남미(South America)순방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3개국 Ecuador, Bolivia 그리고 Paraguay을 방문하였다. 방문기간동안 목요일(7/9) Bolivia Santa Cruz에서 행한 연설이 가장 주목할만한 하이라이트.

유럽국가들이16세기 초 남미를 정복한 이후, 수 백년동안 카토릭교회가 정복자들( Conquistador)이 원주민들의 영토을 유린(蹂躪)하고 탄압(彈壓) 하고 착취(搾取)하는데 ()의 이름으로협조, 동조 또는 묵인(默認)하였던 씻을 수 없는 중차대(重且大)한 종교적, 도덕적 죄과(罪過)에 대하여 머리 숙여 용서(容恕)를 빌었다. 그러나 한국언론은 이러한 보도는 한 줄 없고 남미 전통 모자 Sombrero를 쓴 교황의 모습을 멋쟁이교황이란 제목으로 사진을 올렸을 뿐이다.  사과(謝過)사실을 보도한 710()자 뉴욕타임즈도  정복자들이 수 백년동안 남미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저질렀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필자가 지난 몇 년동안 이번 Francis교황이 방문했던 나라들 중 Bolivia Paraguay 그리고 그 주변국가에 대하여 수 차례에 걸쳐 칼럼을 게재한 일이 있었다. 차제에 이들 나라들이 Francis 교황이 언급하였던 식민주의자(Colonialists)들과 제국주의자(Imperialists)들과 그리고 자본주의자 (Capitalists)들에게 어떻게 착취를 당하였는지, 왜 자원부국(資源富國)들이 빈국(貧國)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 2~3년 전 썼던 칼럼 몇 점을 재열람(再閱覽) 하여 보기로 한다.

 

 

-Bolivia Potosi-

 

지난 500년간 (500 Years Later)”이라는 어구(語句)는 근대(近代) 백인들에겐 아킬레스 건(Achilles Tendon)처럼 매우 치명적 약점을 암시(暗示)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1492년 이태리인 크리스토퍼 컬럼버스가 스페인 왕실의 지원으로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그들이 신대륙을 식민지로 통치, 경영하면서 원주민들과 흑인들에게 자행한 노동착취(搾取) 그리고 역사와 인권말살(人權抹殺)을 감행한 기간이 지난 500년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정복(征服)과 피()정복의 관계에서 피정복자들 중 노예(奴隸)계층이 존재하였지만, 로마시대는 전쟁에서 전공(戰功)을 세우면 노예가 시민(市民)으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주워졌고, 세계를 제패한 징기스칸의 몽고제국도 고려(高麗)역사에서 보듯, 내정(內政)자치(自治)”하도록 허용하였고, 중동지역을 지배하였던 오스만 터키도 그리스 등 유럽지역을 통치하면서 피정복지의 언어와 문화는 존중하여 주었다.

그러나, 지난 500년간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백인들은 달랐다!

Aztec, Maya 그리고 Inca 문명을 말살시켰을 뿐 아니라, 언어와 종교를 강요하였다. 한마디로 혼()과 정신(精神)을 빼 버리려 하였던 일제(日帝)의 한국어 말살과 창씨개명정책과 같은 강압정책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북미주(北美洲)도 자유스러울 수 없다.

지난 한달 동안 필자는 3회에 걸쳐 남미 5개국 Paraguay, Brazil, Uruguay, Bolivia, Peru 그리고 Chile가 당사국이 된, 세 차례의 전쟁사(戰爭史)를 일별(一瞥)하여 보았다. 오늘은 Bolivia 남서부에 위치한 Potosi라는 신대륙의 중세(中世)”도시를 둘러 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 도시야말로 위 남미국가들의 종주국이었던 Spain이나 Portugal이 주축(추후, 대영제국과 불란서, 독일, 미국이 합류)Conquistador(정복자)들의 식민지배정책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Showcase이기 때문에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백인에 의한 원주민/흑인에 대한 지능적이고 체계적인 노동력 착취와 제국주의에 의한 피식민지에 대한 철저한 인권탄압의 역사를 이 한 도시에서 체험할 수 있다.

Potosi는 해발 15,000피트 ( 4,500 Km, 백두산 2,750 Km)에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다. Cerro Rico(자원이 풍부한 산)이라고 명명된 Potosi산 기슭 고지에 1546년도에 형성된 도시로, 은광 발견 후 한 세기 동안은 광산덕분에 유럽의 중요도시 런던, 파리보다 더 부유하였고 인구도 이십만 명을 능가하였다.  

이 도시는 중세를 대표하는 스페인의 대 문호 Miguel de Cervantes가 쓴 돈 끼호떼(Don Quixote 1605년과 1615년 두 차례에 걸쳐 발행) 2 71장에도 재물이 가득한 미지의 땅으로 묘사되었을 정도다. 일설에 의하면 US Dollars 표시인 $가 이 도시의 화폐주물표시인 PTSI에서 연유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Potosi() 순은(純銀)은 야마(Llama)나 노새(Mule)에 실려 Spanish Main이라고 불리웠던 카리비안 연안지방으로 운반되어 스페인 보물선(Spanish Treasure Fleet)에 선적, 종주국 스페인으로 운송되었다.

공식집계에 의하면, 1556년부터 1783년까지 230년간 채굴된 은의 양은 41,000 톤이나 되었고 그 중 8,200톤이 스페인 왕실로 헌납되었다.

은 채광은 수많은 원주민의 생명을 앗아갔는데, 사인(死因)은 가혹한 노동 때문뿐만 아니라, 수은 중독에 기인하였다. 은 원석을 정련(精練)할 때는 우선 수력기계로 원석을 가루로 빻아 높은 온도에서 수은과 섞고, 원주민들이 맨발로 아말감(Amalgam)을 밟게 하였다. 그 다음 수은은 가열을 통해 분리시키는데 이때 치명적인 증기가 발생하였다.

점차, 원주민의 노동력이 줄어들자 이를 벌충하기 위하여 1608년 식민지지배자들은 스페인왕가에 해마다 1,500~2,000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을 수입할 수 있도록 청원서를 올렸다. 식민시대를

통틀어 Potosi에 총 3만 명 이상의 흑인노예가 유입되었다. 이들도 인간 노새(Acemilas Humanas)로서 감옥같이 설계된 Casa de la Moneda(주조창-鑄造廠)에서 혹사(酷使) 당해야 했다. 노새는 기계를 돌리다가 몇 달이 지나면 죽기 때문에, 지배자들은 네 마리 노새 대신 스무 명의 노예를 이용하였다.

1800년 이후 은광이 고갈(枯渴)되면서 주석(朱錫)이 주요 생산품이 되었다. 주석 생산도 결국은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아직도 이 산에서는 은 채굴이 계속되고 있다. 수백 년 은광을 파왔기 때문에 Cerro Rico산의 고도(高度) 300~400 Meter가 낮아졌다고 한다. 현재도 은광을 찾아 지상에서 1,000 Meter가 넘는 지하로 파 내려가는 Digging Deeper 작업을 감행하고 있다. 1,000 Meter이하의 지하작업이기 때문에 1 2일 밤새워 작업한다. 갱도(坑道)의 높이가 1 meter도 되지 않는 곳에서 마취제인 Coca잎을 씹어가며 작업하는 10대 가장(家長)들의 모습은 가슴을 찢어 놓는다.

열악한 노동 여건 때문에(먼지 흡입에 대한 안전 장치가 부족하여) 이곳 광부들의 기대 수명은 매우 낮아 상당수가 규폐증(珪肺症)에 걸리며, 40세 미만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지난 450년여 년간 탄광에서 생을 마감한 원주민, 흑인노예, 그리고 노동자가 8백만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의 두개골(頭蓋骨)을 연결하면, Potosi광산에서 스페인 마드리드 왕실까지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했다!

재물이 풍부한 미지의 땅-Cerro Rico-이 정복자가 들어 오면서 토착원주민을 잡아 먹는 악마의 산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직도, 삶의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원주민 광부들의 모습이 처절(悽絶)하기까지 하다.

한국에서 노동, 민권운동을 하는 소위 좌파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여행길이다.

참고: ( 1 ) Documentaries-Ruben Martinez“When Worlds collide”Owen Alik Shahadah“500 Years Later”

.( 2 ) www.Tiwy,com을 방문하여 Potosi를 검색하면, Potosi시의 찬란했던 영화(榮華)를 볼 수 있고, YouTube에서 Potosi를 검색하면, 많은 이미지를 생동감 있게 볼 수 있다.

( 3 ) Bolivia에는 카리비안 연안 국가와 달리 흑인인구가 없다. 삼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수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피가 섞인 인구가 없는 것을 보면, 흑인노예는 노동만 착취하고 버린 폐기물로 취급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太平洋戰爭(Guerra del Pacifico)-

인간의 역사는 분쟁(紛爭)과 전쟁(戰爭)으로 점철(點綴)되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남북관계 또는 한, , 일 삼국의 관계에서 보듯이….전쟁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무력행사이며, 파괴행위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괴력(怪力!!!)을 미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전(戰前), 전후(戰後)라는 기준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세계 제 2 차 대전종전(終戰)에 따라 찾아온 해방이 기준이 되어 해방 전, 후 라던가 6.25동란, 1.4후퇴처럼 그 시점이 기준(基準)”이 되는 것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紀元前), 기원후로 나뉘듯이, 전쟁시점을 기준으로

정치, 경제, 생활패턴, 가치기준 등이 변한, 즉 한 시대가 시작되고 종결되는 Epoch(기원)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의 승패에 따라 승전국(勝戰國)이 유리하도록 국경선(國境線)도 새로 설정됨은 물론이다.

국경선이 다시 그어지면서 겪는 아픔과 슬픔을 우리는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게재되었던 마지막 수업에서 간접 체험하였다.

지난 칼럼에서 우리는 남미여행 중 19세기 후반으로 날아가 Andes산맥 동부나라들 사이에서 1865년으로부터 5년간, 수로(水路)와 자원을 확보하려는 ParaguayParaguay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Brazil, Argentina, Uruguay사이에서 발발하였던 전쟁을 참관(參觀!!!)하였다.

오늘은 먼 길, 남미까지 날아갔으니 남미대륙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Andes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넘어가 보기로 한다. 

대륙 중앙부에 위치한 Paraguay전쟁으로 양측 4개국에서 3백만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하여 한 나라가 지상에서 거의 소멸할 뻔 하였던 쓰라린 기억과 상처가 아물기도 전, 남미 땅에 또다시 전쟁의 회오리 바람이 불어 닥친다. 이번에는 Bolivia, Peru 두 나라와 Chile사이에 4~5년간 피나는 혈전이 벌어진다. 역시 자원(資源)을 탐()하는 싸움이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19세기 후반 정확히 말하면 1879년 이전까지 Bolivia가 현재 Chile의 북부 태평양(太平洋) 두 해안(海岸)도시인 Antofagasta에서 그 북부 Tocopilla에 이르는 175 Km (108 Miles)거리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었던 시대의 이야기다. 이 지역은 세계적으로 건조하기로 유명한 Atacama 사막이 있는 곳으로 당시 Peru의 남부와 Bolivia의 서부지역에 긍()해 있었다.

PeruBolivia 영토(領土)였던 이 사막지역에 탄약(Gunpowder)의 원료로 쓰이는 초석(硝石)과 질산염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으나, 주로 광산의 개발과 운영은 국경을 넘어 온 남쪽 Chile의 광산업자들에 의하여 이루어 지고 있었다. 광물(鑛物)이 세계적으로 수요가 증가하자, Peru정부는 광산의 국유화 조치를 취하였고, Bolivia정부는 광물과 철도회사 수익의 10 %에 해당하는 세금을 부과(賦課)시킴으로써, Chile와 마찰을 빗게 되었다.

 

Bolivia Antofagasta Chile인 회사 소유 질소염 탄광을 몰수(沒收)하자, Chile군이 1879214 Antofagasta항을 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된다. 처음에는 Peru 정부가 중재(仲裁)에 나섰으나, 양측이 수용하지 않아, 무위(無爲)로 끝나 버린다. PeruChile 정부로부터 전쟁에 관여하지 말도록 강요 받았으나, 당시 Bolivia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있었던 관계로 조약에 따라, Peru Bolivia와 연합군(聯合軍)을 형성, 참전하게 된다. 45 Chile는 이들 두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

초반 양측 모두 해전(海戰)에 주력하였다. 처음에는 Peru해군이 승기를 잡았으나, Bolivia-Peru군은 군비(軍備)가 빈약할 뿐 아니라, 사기(士氣)도 낮아, 독일군의 전신(前身)인 프러시아(Prussia)군의 영향을 크게 받은 Chile군은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급기야는 1881 Peru의 수도 Lima까지 Chile해군에 의해 함락된다. 내륙으로 진격한 Chile육군은 Peru 전 국토를 능욕(凌辱)한 후, 결정적으로 Peru 북부 Huamachuco전투에서 대첩(大捷)을 세우게 된다.

4년간의 기나긴 전쟁은 1883 10 20 Chile Peru 두 나라가 Ancon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전쟁이 종식되었고, Bolivia는 그 이듬해 휴전조약에 서명하게 된다.

전쟁은 두 패전국 특히 초기에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였던 Bolivia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참화(慘禍)를 안겨 주었다.

Peru는 지금의 Chile 최북단 해안도시 AricaIquique가 소재한 Tarapaca지역을 상실(喪失)하였고, Bolivia는 태평양 해안(海岸) 두 도시 Tocopilla Antofagasta를 잇는 Litoral () Chile에 양도(讓渡!!!)하게 된다. 이로써, Bolivia는 바다가 없는 나라로 전락(轉落)하여 버린 것이다.

Bolivia가 풍부한 지하자원보유국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이 남미국가 가운데 Bolivia를 최빈국(最貧國)의 나락(那落)으로 빠트려 버리고 말았다. 패전이란 이토록 비극(悲劇)적이고 비참(悲慘)한 것이다.

전쟁 종식된 지 128년이 경과하였지만, Bolivia인들의 바다로 향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Bolivia정부는 20113월 실지(失地)회복을 위하여 네덜란드 헤이그 (Den Haag-The Hague-)에 소재한 국제사법재판소(ICJ-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제소(提訴)하는 한편, Evo Morales대통령은 지난 63~5 3일간 Bolivia Cochabamba에서 개최되었던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총회에서 Chile정부를 향해 Guerra del Pacifico, Bolivia로부터 빼앗은 땅을 반환(返還)하도록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Chile대표단은 이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싸움(una guerra estupida)

-Chaco 전쟁-

727일은 1950 625일에 시작된 동족상잔(同族相殘) “한국전쟁 3 1개월 2일만에 총성(銃聲)이 멈춘 날이다. 이제 정전(停戰)이 된 지도 59년이 경과하였다.

민족의 비극 6.25 동란의 민족사적 평가는 먼 훗날로 미루기로 하고, 한반도에서 수직으로 터널을 뚫으면 반대편에 나타날 Bolivia Paraguay 두 나라가 한반도의 6.25보다 꼭 18년 전() “2 11개월 3” (1932.6.15. ~ 1935.6.12)동안 치루어 졌던 Chaco전쟁을 들여다 보기로 한다.

Bolivia하면, 최근 MB의 백형(伯兄)되시는 이상득(李相得) ()의원(77)이 자원외교를 위하여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비행시간만 30여 시간이 넘는 곳을 6차례나 인디오 출신 Evo Morales 대통령을 찾아 나섰던 자원부국(資源富國)”으로 알려진 나라이고, Paraguay라면 World Cup “Mobile Phone” 응원녀(應援女)로 전세계 호남(豪男)들을 뜨겁게 달구었던, 바로 그 남미 글레머아가씨의 나라로 쉽게 연상되지만,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에는 19세기 말부터 양국간 영토분쟁지역으로 잦은 마찰이 있어 왔던 Gran Chaco (면적 64만 평방 키로, 남북한 면적의 3)가 유전(油田)지역일 것이라는 판단 Paraguay()을 이용하여 대양(大洋)으로의 수로(水路, Waterway)가 절실하게 필요하였던 Bolivia의 욕구(慾求)가 맞물려, 양측 총() 10만 명이 넘는 전사자(戰死者)를 낳은 20세기 미주대륙에서 발발하였던 가장 치열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이들 두 나라는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중남미 국가들 가운데 가장 빈국(貧國)에 속하며, 19세기에는 인접(隣接)국가들 즉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의 전쟁에서 패배(敗北)하여 국토를 상실(喪失), 바다 잃은 내륙(Landlocked)국가로 전락, 대양(大洋)을 향한 열망이 하늘을 찌르는 듯 하다는 점 그리고 건국의 역사적 배경과 국어(國語)가 동일하다는 점이다.

먼 나라에서 보면, 형제국가처럼 보이는 이들 두 나라가 피비린내 나는 3년간의 전쟁을 수행한 데는 양측 모두 엄청난 판단착오과 자원을 확보하려는 외국세력(外國勢力)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1930년대 초 남미대륙을 남북으로 종단(縱斷)하는 안데스 산맥일대에서 오일(Oil)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안데스 산맥의 기슭에 위치한 광활한 Gran Chaco지역 역시 지질학적으로 분명 유전(油田)지대일 것이라는 세계적인 Major(석유재벌)들의 예측(豫測)”이 두 나라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이미 Rockefeller()가 대주주인 Standard Oil(현재 ExxonMobil의 전신) Bolivia 동부 Villa Montes지역에서 석유를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Bolivia정부와 밀착(密着)되어 있었고, 네덜란드 계 Royal Dutch Shell Oil Paraguay정부의 배후(背後)를 조정하고 있었다..

1930년 초 Paraguay Bolivia인구의 1/3 밖에 되지 않았다. (880,000 2,150,000).

전쟁수행방식은 Bolivia()은 정통적인 전략을 고수하고 있었던 반면, Paraguay군은 게릴라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다.

전쟁 초, Paraguay군은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4,026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군인들은 거의

백인과, 백인, 원주민 혼혈인 Mestizos로 구성되어 있었던 반면, Bolivia군은 보병(步兵) 90%는 안데스 산맥 고()지대에 살고 있는 인디오를 포함하여 Gran Chaco와 연고(緣故)가 없어 전쟁에 냉담한(apathetic) 장정(壯丁)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장교들은 스페인이나 유럽출신이민자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전군을 지휘하는 참모총장은 세계 제 1차 대전참전 독일군 출신 Hans Kundt장군이었다. Bolivia의 군대는 6만에 달하였으나, 2/3 정도는 지형관계로 전장(戰場)터에 동원되지 못했다. 그러나, Paraguay는 더 이상 주변국가에 패배하여서는 안 된다는 각오로 벼락 끝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버스는 군 수송차량으로 수용되었고, 결혼반지와 보석 등 대외결재수단이 되는 귀금속은 무기를 구입하는데 쾌척(快擲)되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17살 되는 소년들까지 징집되었고, 경찰관들은 유니폼을 갈아 입고 전선(戰線)으로 향했다. Bolivia는 군수물자를 고도(高度) 4,000m가 넘는 안데스 산맥을 가로 질러, 동서(東西) 800km에 달하는 거리를 수송하는데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던 반면, Paraguay Paraguay강을 이용, 수로(水路)로 무기와 군수품을 용이(容易)하게 운반할 수 있었다.

양국이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기 때문에, 해상으로 수송되는 무기는 바다가 있는 인접국의 승인이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바다가 있는 Argentina Paraguay를 지원, 참전하자, 전쟁초반 Bolivia의 기세는 꺾이기 시작, 결국 전쟁은 Paraguay의 승리로 끝났다.

아이로니칼하게도, 종전(終戰) , 땅을 파보니 기름 한 방울 생산되지 않는 불모지로 판명되었다. 무고(無告)한 생명들만 희생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총탄에 의한 죽음보다는 갈증(渴症)과 말라리아 등 괴질에 의해 희생자가 더 많았다.

특별한 대의명분(大義名分)도 없고, 양국간 이렇다 할 증오심도 없었던 글자 그대로 대리(代理)전쟁의 양상을 띈 전쟁이었던 것이다. 오죽하였으면, 휴전이 발표되자, 양국간 병사들이 서로

부둥켜 안았을까? 수통(水桶)의 물을 나누어 마시면서……

Chaco전쟁을 어리석은 싸움(una guerra estupida)”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은 위정자들의 광기(狂氣), 판단착오(錯誤) 또는 오류(誤謬)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그러하였고, 6.25가 그러하였고, Iraq War가 그랬던 것처럼

……

그러나 두 나라의 국경을 확정 짓는 양국간 조약은 종전된 지 74년이 경과된 2009 428일이 되어서야 Argentina Buenos Aires에서 체결되었다.

국토와 바다로 향하는 수로를 잃은 Bolivia국민들의 엄청난 상흔(傷痕)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필자가 한반도(韓半島)와 상관도 없는 지구 저편의 역사를 거론하는 이유는 역사는 어느 곳에서라도 반복(反復)될 수 있기 때문이다. (History repeats itself.)

() 1.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피 흘려 지킨 Paraguay Chaco지역을 지주(地主)

아르헨티나 Cansado Hermanos, S.A.사가 1,500.000 에이커(스위스보다 넓은 지역)

달하는 땅을 2000년 문선명(文鮮明)씨가 교주로 있는 통일교 (Unification Church)재단에 매각하였고 George W. Bush 전 대통령도 2006 10 Chaco지역의 100,000 에이커의 땅을 구입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2. 보다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독자들께서는 Google에서 Chaco War: Anglo-Dutch Resource Grab(資源爭奪戰)을 참고하시고, YouTube를 통하여 Chaco War에 참전한 병사들의 참상(慘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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