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원 전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회상록을 발간했다.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김 전 부회장은 ‘군인으로 외교관으로 체육인으로(기파랑 출간)’라는 제목의 회상록을 통해 군인·외교관·체육인으로 평생을 보낸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했다. 지난 1946년 해군 창설 요원으로 참가, 해군 소위로 임관한 그는 6·25전쟁 당시 많은 전공을 세웠다. 61년 준장으로 예편, 하와이 주재 총영사로 임명되면서 두 번째 인생 행로인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78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월남대사관 공사, 주 크메르대사, 주 스웨덴왕국 대사를 차례로 역임했다. 그는 “회고록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최근 일부 정치인들이 보여 준 국가안보에 대한 의식 변화가 나로 하여금 마음을 바꾸게 했다”고 회상록 발간 이유를 설명했다. 안준용 기자 jyahn@koreadaily.com”
귀한 책자를 받은 답례로 지난 10여 년간 써놓았던 오백 여점 칼럼 중에서 선생께서 관심을 가지실 주제로 쓴 글 십 여 점을 골라 보내드렸다. 8월 15일(화) 아침 김세원(金世源)대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 딸네 내려왔소이다. 딸네 Apartment로 7시까지 오시겠소? 주소는 지난 번에 알려준 바로 그곳이예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사님” 사무실로 나와 곰곰히 생각하니 현역(現役)인 후배가 모시는 것이 도리일 것같아 만날 장소변경을 위해 김대사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여성분이 전화를 받았다. “김대사님 따님되시나요? 제가 댁으로 찾아뵙는 것보다는 댁 근처에 제가 잘가는 독일레스토랑 Heidelberg라고 있읍니다. 독일음식이 괜찮으시다면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2nd Avenue 85~86가 사이 옛 저먼(Old German)타운에 있습니다. 7시에 뵙기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부슬비가 아스팔트를 촉촉히 적시는 날 대선배와의 상견례(相見禮)는 이루어졌다. “선배님, 광복 72주년, 건국69주년이 되는 8월 15일 건국과 건군의 대선배님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있어 대영광입니다.” “나 지금부터 한사장 이름 이니셜을 따 T K라고 부르리다. T K가 내 해군후배이니 더욱 반갑소이다. T K는 군번이 어떻게 되지요? 나는 특교대(特敎隊) 제 1차로 군번은 80170이예요. 대한민국이 건국(建國)되기 전 군대가 없을 때, 해양경비대로 입대했지요. 해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역임하셨던 손원일(孫元一)제독은 80001이고...” “예 저는 특교대 48차로 군번은 86201입니다. 제가 1969년 임관하였으니 1948년 건군(建軍)후 제 앞 선배 장교가 6,200명 계셨다는 뜻이겠습니다.” 미국에서는 흔한 일입니다만, 선배님께서는 46년부터 89년까지 현역으로 세 대통령을 모셨습니다!!!” “그래요, 경무대로 들어가 이승만박사를 만나뵙고, 5.16. 혁명 후 박정희장군이 날보고 하와이 총영사를 하라고 해 뜻하지 않게 외교관이 되었고, 크메르대사로 나갔다가그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탈출하여 본부에 들어와 있으니 스웨덴대사로 나가라고 해 스웨덴 국왕도 알현(謁見)할 기회가 잇었지요. 그때 스웨덴어(語)도 공부해 현지인과 현지어로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대사였지요. 스웨덴인과 독일인들 사이에 통역인없이 서로 의사가 통하는 것을 그 때 알았어요. 몇 년 근무 후 후배들에게 숨통을 터주기위해 당시 박동진(朴東鎭 1922~2013)장관에게 이제는 후진(後進)들을 위해 물러나있겠다고 했더니 나를 그 유명한 박종규*(朴鐘圭 1930~1985) 대한체육회회장에게 소개해 줍디다. “ “물론 박통(朴統)께서 계셨을 때겠지요?” “그렇지요. Pistol Park의 이미지가 워낙 좋지않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88올림픽의 원(元) 착안자(着案者)는 박종규회장입니다. 올림픽 유치를 위해 대사를 지냈던 사람이 필요했던겁니다 “ “그럼 81년 Baden Baden현장에 계셨겠습니다? 제가 바로 그때 Frankfurt에 은행주재원으로 있었습니다. 저는 올림픽아이디어는 전두환(全斗煥)정권이 정통성을 확보하기위한 차원에서 착안하지않았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1996년 쯤이나되어 올림픽을 유치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나고야는 1977년부터 준비하고 있었어요. 박종규씨의 아이디어와 현대 정주영(鄭周永 1915~2001)의 뚝심아니었으면 유치는 가능하지 않았지요. 불가능을 만들어내었다고 봐야해요. 올림픽을 치루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 상상할 수 있겠어요? 그것이 우리민족의 저력(低力)입니다. ”
다음은 8월19일(토) 자 동아일보 사설 마지막 부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도 김대중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 “평화를 지키는 안보를 넘어 평화를 만드는 안보를 이루겠다”고 평화론을 거듭 역설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평화를 지킬 준비가 돼 있는지부터 자문해야 한다. 평화는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다. 자강(自强), 즉 자주국방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미국의 동맹 이탈이나 이완 가능성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42년 전, 김세원대사께서 공산화(共産化)된 크메르를 탈출 서울로 안착했을 때, 일성(一聲)과 너무나 흡사하다!
“선배님께서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반세기동안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선배님 삶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입니다. 선배님 자랑스럽습니다.부디 만수무강(萬壽無疆)하십시요. 자주 뫼시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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