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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 of 1812
12/30/2012
War of 1812 (1812년 전쟁) 逢 南 韓 泰格(www.TedHan.com) 다시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모든 언론에선 한 해가 가기 전, 지난 365일 동안 발생하였던 사고, 사건소식을 정리하여 보도하거나, 한 해 세상을 떠난 유명인들의 업적을 돌이켜 보도하는 것이 관행(慣行)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지난 365일 동안의 이슈는 기존언론에 맡기기로 하고, 오늘 필자는 올해가 흘러가기 전, 꼭 200년 전인 1812년에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지 알고 지나가는 것이 “오늘의 미국”을 이해하는 데 일말(一抹)의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할리우드(Hollywood)가 제작하는 작품 중 아메리카 원주민(原主民)인 인디언을 등장시키는 서부(西部)활극이나 세계 제 2 차 대전을 작품화한 전쟁영화에는 백인 개척민들(Settlers)이나, 미군병사들이 언제나 “정의(正義)와 선(善)의 편”으로 묘사(描寫)되어 있다. 필자가 어렸을 적 서울의 국제극장이나 을지극장에서 서부영화를 관람하였을 때, 인디언들이 “총을 쏘며” 백인들을 공격하는 장면을 자주 보았다. “무고(誣告)한” 백인들을 공격하는 “불의(不義)의 집단”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관객들은 무심코 넘어갔었겠지만, 필자가 오늘 2012년이 가기 전, “1812년 전쟁”이 어떻게 발발(勃發)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면 총기(銃器)제조를 하지 못했던 인디언들이 어떤 경로로 총을 소지(所持),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 해답(解答)을 찾게 된다. 1776년 미국이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겨우 기틀을 잡아가고 있을 무렵인 19세기 초 그러니까 독립한 지 36년이 경과된 1812년 미국의 제 4 대 James Madison(1751~1826)대통령(재임기간 1809~1817)은 대영제국을 상대로 1810년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이 전쟁이 1812년 전쟁(War of 1812)으로 불리운다. 이 1812년 영미전쟁은 광의(廣意)로는 유럽에서 진행 중이었던 나뽈레옹 전쟁(Napoleonic Wars)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불란서 나뽈레옹이 적국(敵國)인 영국을 고사(枯死)시키기 위하여 불란서 지배하에 있었던 유럽대륙의 모든 나라들에게 영국과 교역(交易)하지 않도록 나뽈레옹황제의 칙령(勅令)을 하달한 상황에서 당시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나뽈레옹전쟁과는 무관한 미국은 중립국(中立國)의 입장에서 대서양을 횡단하여 불란서와 교역을 지속하고 있었다. 당시 대서양을 지배하고 있었던 영국은 미국을 적국인 불란서와 교역하는 적(敵)으로 간주하여 미국상선의 선원들을 강제 징발(徵發)하여 자국 군함에 투입시켰다. 이는 영토침입이상의 주권에 대한 도발(挑發)로 여긴 미국의 Madison대통령은 대영제국과 대영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캐나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당시 미국의 영토는 Mississippi강 이동(以東)이었던 시절로, 대영제국은 1783년과 1794년 양차에 걸쳐 미국정부와 신대륙의 영토를 포기한다는 조약을 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척시대의 적”이었던 Creek Red, Fox, Miami, Ottawa, Delaware족(族) 등 16개 아메리칸 인디언종족들에게 “미국으로부터의 해방”을 미끼로, 총기를 제공하여 미국의 후방을 교란(攪亂)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보는 총기류의 출처(出處)는 대영제국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유로 발발된 전쟁은 신생국으로 아직 군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던 미국으로서는 커다란 시련과 도전이었다. 전쟁 전(前) 워싱턴 정가는 연방정부 권한보다는 각 주(州)의 권한을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세력들 때문에 연방정부의 대통령인 Madison대통령의 입지(入地)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의회와 주지사들은 전쟁준비를 하려는 Madison대통령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고, 국민여론은 분열되어 있었다. 민병대(Militia)들은 자기고향을 떠나 전쟁을 수행하려 들지 않았다. 특히 캐나다와의 교역이 주(主) 산업이었던 뉴잉글랜드지방의 반대는 그 어느 주보다도 거세었다. 당시 군대라고는 민병대(民兵隊)가 주력이었던 미국은 그들마저 한마디로 오합지졸(烏合之卒)이었다. 전쟁수행능력이 없거나(incompetent), 겁쟁이들(cowardly)이 많았다. 디트로이트 한 장군은 총 한방 쏘아 보지도 못하고, 소규모 영국군에게 투항해 버린 경우도 발생하였다. 은행들은 고의로 문을 걸어 잠궈 버려, 군비조달에 큰 곤경을 겪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1813년 오대호 중의 하나인 Erie호(湖)해전에서 미국이 승기를 잡으면서 전세(戰勢)는 역전(逆轉)국면을 맞았다. 그러나, 지상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워싱턴을 공격 1814년 8월24일 백악관을 불살랐다. 역사상 치열하였던 그리고 승전(勝戰)으로 이끌었던 해전 중 하나로 기록되는 Maryland주 Baltimore어귀에 있는 Ft. McHenry방어전에서는 우리가 현재 부르는 The Star Spangled Banner라는 국가(國歌)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815년 뉴 올리언즈지역 전투에서 제 7 대 대통령(1829~1837)이 되었으며 우리가 현재 20불 지폐(紙幣)에서 마주 하는 Andrew Jackson장군의 영도 하에 영국군을 격퇴(擊退)시킴으로써 1815년 2월 3년간의 전쟁은 Treaty of Ghent에 따라, 양측 어떤 측도 영토를 얻거나 상실하지 않고 종전(終戰)하게 된다. “제 2 의 독립전쟁”으로 부르는 “1812년 전쟁”의 승전(勝戰)을 통하여 미국민들은 명예와 자부심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Madison대통령의 인기는 하늘에 닿았고, 미국도 World Power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Manhattan의 Madison Avenue라던가, Madison Square Garden과 같은 명칭은 War of 1812 (1812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제 4 대 James Madison 대통령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Written by Ted Han on December 30, 2012 NavyOfficer86201@gmail.com (718)63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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