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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보성전문 스포츠 - 인권환 교수의 高大遺事 (26)
03/04/2011
Posted by Los Angeles 김성철 (경영 58) Bt_email

다음글은 교우회보에 실린  인권한 (국문56) 고대명예교수의 고대스포츠 역사이야기의 일부

 

체육 통한 인격도야, 조국 독립 위해 시작된 보전 스포츠

 
1920년대 보전 스포츠와 조택원, 김성태 선수
  
 
보전 스포츠는 192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출발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당시의 상황에서 알 수 있다.

첫째, 1920년 제6대 교장에 취임한 고원훈(高元勳, 1891~1950년 납북)과, 1922년에 교수로 부임한 홍성하(洪性夏, 경제•재정학 담당) 두 사람의 스포츠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보전 체육은 그 굳건한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고원훈은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출신으로 1911년부터 보전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교발전에 크게 기여하여 왔는데, 1920년에는 현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를 결성하여 민족체육 발전의 터전을 마련한 체육계의 선구적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1대에서부터 4대까지 체육회 이사장 직을 맡으면서 많은 보전인들을 조선체육회의 활동에 참여시켜 보전 스포츠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홍성하는 1922년 보전 교수로 부임한 이래, 1938년 직을 사임하기까지 16년간 보전 체육부 창설과 육성에 전념하여, 정구(1921년), 축구(1923년), 농구(1928년), 럭비(1929년, 한국 최초), 육상(1922년 경) 등 무려 13개의 운동부를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직접 각 운동부의 감독과 책임을 맡아 보전 스포츠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둘째, 이상 두 사람의 헌신적 노력으로 탄생한 각 운동부가 전국적인 각종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는 등 괄목할 성적을 거두어 보전 스포츠의 위력을 과시하고 그 명성을 떨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최초의 고연전(보연전)이 열린 것도 이 시기로, 정구가 1925년의 전조선정구대회(1회전에서 대전, 3대1 승리) 축구는 1927년 전조선축구대회(준결승 대전, 3대0 패배)에서 격돌하여 그 이후 고연전의 서막을 열었던 것이다.

셋째, 이 시기 보전 스포츠의 탄생과 활동은 단순히 체육활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항일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일제치하에서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스포츠밖에 없다”는 일념이었으므로, 당시 보전의 스포츠는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때 보전 스포츠 발전의 주역이었던 홍성하 교수는 뒷날의 회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전의 젊은 학도들을 민족적 역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육체적 능력의 발달이 정신적 능력의 발달과 반드시 평행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즉 체육을 통한 인격도야와 아울러 능력을 가진 인물을 육성하여 특히 조국의 독립 회복에 역군이 되게 하는 동시에 미래에까지 유지 계승시키는 사도의 역할을 할 인물을 배출시키는 것이 보전 체육의 전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석탑야사, 홍성하 편>(高友會報, 1973.2.5)

이로써 1919년 3.1운동의 실패 후 일어났던 1920년대 보전 스포츠 열기의 이념적 지향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점은 당시 불려진 보전 응원가의 “높은 이상, 넓은 도량, 민활한 기술/ 대지 위에 스포츠 레코드를 그은 자/ 오늘날도 이겼다네 보성전문군/ 영원토록 승리 가질 이 나라 용사”란 가사 내용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상에서 1920년에 비롯된 보전 스포츠가 1930년대, 그리고 1945년 해방 후 오늘날에 이르는 고대 스포츠사의 원류를 이루었고, 그 중심에는 고원훈, 홍성하란 공로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에 활약한 운동선수로서 보전 스포츠를 대표할만한 스타는 어느 종목의 누구들이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여 이 짧은 글에서는 당시의 기라성(綺羅星) 같은 보전 각부의 선수들을 다 소개할 겨를이 없다. 그래서 이 글의 표제에 올린 정구의 조택원과 축구의 김성태 두 사람에 국한하여 말하기로 한다. 그런데 위의 두 사람이 보전을 다닌 사실이나, 보전 운동선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이들이 보전 입학 후, 1년 후 중퇴하였을 뿐 아니라, 이들이 그 후 스포츠와 완전히 다른 분야에 진출, 크게 성공하여 이들의 전력(前歷)이 가려졌던 때문이다. 즉 조택원(趙澤元, 1907~1976)은 근대의 명무(名舞)로 날린 한성준(韓成俊, 1874~1941)은 물론, 현대 한국 무용의 전설 최승희(崔承喜, 1911~1967)와 쌍벽을 이루면서 일본, 프랑스에 유학하고 유럽과 미국에서의 수많은 공연을 통하여 절찬을 받은 한국 무용계의 선구자였다. 그리고 김성태(金聖泰, 1910~)는 “동심초” “산유화” “이별의 노래” 등 수많은 명가곡을 작곡한 음악가로 서울 음대 교수, 예술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제명(玄濟明, 1902~1960)과 함께 한국 음악을 주도한 뛰어난 작곡가 겸 지휘자였다. 
 
 
 
 
 
 
 
앞서 말한대로 최초의 고연전은 1925년 정구 게임에서 이루어졌다. 이 대전에서 보전은 3대1로 이김으로써 첫 고연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는데, 이 때의 주력 선수가 조택원이었다. 조택원은 원래 휘문고보 정구선수였다. 그의 출중한 정구 실력이 인정되어 1922년 정구팀을 결성하여 1924년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던 보전팀에 스카웃되었고, 마침내 첫 고연전에서 실력발휘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좀더 운동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다니던 보전 법과를 2년만에 중퇴하고 조선상운 정구팀에 입단하였다가 곧 일본에 건너가 무용의 길로 들어섰다. 한편 1920년대 초반, 정구부에 이어 창단된 고대 축구부는 실력이 미치지 못해, 각종 대회에 출전하였으나 번번히 초반에 탈락하여, 당시 호화 멤버로 승승장구하던 연전 축구팀에 완전히 압도당하였다. 그러다가 1927년 첫 번째 축구 고연전에서도 3대0이란 참담한 스코어로 패배하여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와같은 일방적 패배의 원인은 당시 선수 스카웃전에서 연전에 우수 선수들을 모두 빼앗긴 때문이었다. 당시 연전은 교지가 넓어 다양한 운동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보전의 송현동 교지에는 달랑 정구 코트만이 있는 터여서 스포츠 환경상 매우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중학을 졸업한 우수 선수들이 보전을 기피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고연전에서마저 완패한 보전 축구팀은 절치부심(切齒腐心) 설욕을 벼르고 있었다. 
 
 
이 시기 경신중학 축구팀은 축구의 천재라 일컬어졌던 김용식과 김성태 외에 다수의 우수한 선수를 확보하여 전문학교 축구팀을 이기는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서 보전 축구부는 경신의 주력인 두 선수를 연전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마침내 스카웃에 성공, 최강의 팀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년 후 어렵게 스카웃한 김성태가 다른 곳도 아닌 라이벌 연전으로 재입학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양교간 양보없는 스카웃전에서 연전의 교묘한 술책에 빼앗긴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즉 김성태가 연전에 가서 한 때 연전 축구선수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연전 재입학은 본인의 종교와 음악공부에의 열망 때문이었다. 김성태의 집안은 대대로 기독교 신앙의 가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의 피아노나 오르간, 그리고 합창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찍부터 서양음악에 익숙해 있었다. 그래서 연전 종교학과에 옮겨 음악에 전념하려한 때문이었고, 그는 곧 음악 공부차 일본으로 떠나 평생을 음악인으로 보냈다.

당시 보전 축구팀에는 김성태와 함께 경신에서 온 김용식(金容植, 1910~1985)이 건재하였고, 30년대 들어 입학한 배종호(30상과), 임창식(32상과), 우정환(34법과), 민병대(34상과) 등 한국 축구사에 찬란한 별들이 모여 국내 대회는 물론, 전일본선수권을 여러 차례 제패하는 막강의 전력을 과시하였다. 그 중에도 김용식은 한국 축구사의 전설적 영웅으로, 한국 축구의 영원한 스승으로 호칭되는 축구 천재로, 1937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팀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참가해 우승후보 스웨덴을 물리치는 눈부신 활약을 펼쳐 보전 축구의 명성을 드높이기도 하였다. 
 
 
인 권 환
국문56
모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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