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mson 광장북남미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교우들 간에 자유롭게 정보를 교환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입니다.
지역별 교우회에서 게시물을 등록하면 자동으로 리스팅됩니다. 인증된 회원에게만 읽기, 쓰기 권한을 허용합니다. Only for Korea University Alumnus
朴 正熙 "將軍"
05/15/2011
朴 正熙 “將軍”
逢 南 韓 泰格 (www.TedHan.com)
어제 필자는 Manhattan 42가 근처에 용무 차 갔다가, 세계 각국에서 밀려드는 관광객들 사이에 휩쓸려 Times Square로 떠 밀려 갔다. 그곳에는 진화된 LED 전광판들이 80년 만에 불어 닥친 세기적 금융위기와 하늘 높이 치솟는 인플레이션 등은 아랑곳없이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메카(Mecca)임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그 많은 미국 국내외 전광판 가운데 국가별로 대한민국 것이 제일 많았다. 독일기업브랜드도 아니었고, 일본회사 것도 아니었다. 삼성, LG, 현대, 기아, 한국타이어가 그것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임차료가 가장 비싸다는 바로 타임즈 스퀘어 중심 44~45가 Broadway에는 한인 교포가 소유, 경영하고 있는 의류판매체인 Forever 21이 삼개층(層)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성적표(成績表)를 받아 쥔 느낌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과 미국으로 이민 온 교포들의 피와 땀의 결실(結實)을 한 눈에 보는 듯 하였다.
내일은 5월16일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6.25. 없이 논할 수 없듯이, 5.16. 을 부정하고는, 오늘의 대한민국의 경제, 사회를 말 할 수 없다.
그것도 올해는 50주년을 맞는 해이다.
어느 정도 기억하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이를 열 살로 잡는다면, 5.16.을 체험하였다고 볼 수 있는 나이는 지금 예순 이상이라고 하겠다. 대한민국인구 중 예순 이상의 인구가 15%정도이니 5.16.을 체험하였던 한국인구도 그 정도는 되리라.
그 나머지 85%의 인구는 여러 매체를 통하여 5.16.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필자는 대한민국인구의 15%안에 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수도(首都) 게다가 권력의 중심부인 경무대, 중앙청이 가까운 곳인 효자동, 청운동에서 중, 고교학교시절을 보냈으니, 5.16.을 말할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50년이 경과한 아직까지도 5.16.의 주역 “박정희”를 두고 독재자(獨裁者)라며 손사래를 치는 인사들이 많아 그의 동상하나 제대로 세울 수 없는 상황이나, 필자는 박정희야 말로 한반도를 통치하였던 지도자들 가운데 국민들에게 가장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 준 민주적(民主的)이었던 영도자였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론(推論)하여 본다. 인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福(복, Happiness)을 추구하여 왔다.
福(복)의 기본요소는 글자에서 보듯, 먹는 일이다, 글자를 풀이하며 보면 一 은 하늘, 세상을 뜻하며, 口(구)는 입을 뜻하고, 田(전)은 논, 밭을 뜻한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전답(田畓)을 갈아, 농사지어 먹을 양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복(福)의 첫째 요소가 되는 것이다. 바로 박정희는 매년 보릿고개를 넘겨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국민들에게 그 복을 가져다 주었고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原動力)을 심어 준 사람이다. 아무리 말하고 싶어도, “생존하여 있지 못하면” 말 할 수 없다. 또한 필자 개인적으로는 박정희의 유일한 실책(失策)(!)이라고 생각하는 사항이지만, 경제가 어느 정도 궤도에 들어 선 70년대 이후, 전(全)국민들에게 모든 정보를 공유케 하려는 한글전용, 교육평준화야 말로 민주화 시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정희는 행동으로 힘(力)을 보여 주는 조직 또는 집단에서 움직였던 사람이다. 그는 규범이 몸에 밴, 장군(將軍)출신이다. 군대란 행동으로 힘(力)을 보여 주는 집단이다. 경제는 행동이다. 활동 없이, 경제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당시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 즉 인력자원”밖에 없었다. 동력을 만들기 위하여는 집중(集中)밖에 없었다. 태양열을 이용하여 종이를 태우기 위하여는 초점(焦點)을 맞추어야 한다. 민주란 백가쟁명(百家爭鳴) 즉 온 백성의 소리를 다 들어 보자는 공론(空論)이다. 잃어 버린 100년 세월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당시 대한민국 제일의 엘리트 집단인 군대출신이었기 때문에, 그 힘을 바탕으로 쿠테타를 일으킬 수 있었고, 그 힘을 “합리적으로 조직적”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성공한 혁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솔직히 받아 들이자. 안중근 의사(義士)를 안중근 장군(將軍)으로 호칭을 바꾸자는 운동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처럼, 박정희대통령이 아닌 박정희”장군”이 그의 이미지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호칭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1960~61년, 말 그대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는 조국을 구할 수 있었던 조직은 당시 군(軍)밖에 없었고, 그들이 그것을 해 내었기 때문에, 장군(將軍)호칭이 대통령(大統領)호칭보다 그의 절박(切迫)했던 입장과 상황을 “더 절실(切實)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그의 5.16.쿠테타는 원죄(原罪)가 될 수 없다.
그가 아니었던들, 오늘의 삼성도, LG도, 현대도, 기아도, 한국타이어도, Forever 21 도 존재하지 않았다.
Written by Ted Han on May 15, 2011 NavyOfficer86201@yahoo.com (718)631-1500
로그인 하시면 이 글에 대한 코멘트를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LOG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