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mson 광장북남미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교우들 간에 자유롭게 정보를 교환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입니다.
지역별 교우회에서 게시물을 등록하면 자동으로 리스팅됩니다. 인증된 회원에게만 읽기, 쓰기 권한을 허용합니다. Only for Korea University Alumnus
'미친 소'이어 '미친 등록금'까지 세상은 넓고 분노할 일은 많다
06/14/2011
여기 낯익은 흑백사진 한 장이 있다. 학도병인지 정규군인지 모를 복장을 하고 어깨에 경기관총을 멘 청년 셋.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식민지 조국의 광명을 되찾기 위해 일본군을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한 '마지막 세대'인 노능서(魯能瑞)·김준엽(金俊燁)·장준하(張俊河)의 20대 시절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지만, 이 빛바랜 '마지막 광복군' 사진은 8·15 해방 전에 찍은 사진이 아니다. 8·15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지 않은 1945년 8월 20일 중국 산둥성(山東省) 웨이현(濰縣)의 한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그런데 청년들의 표정에선 도무지 광복의 환희를 느낄 수 없다. 그럴 수밖에. 해방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울분에 찬 3명의 광복군 세 청년은 중국 시안(西安)의 광복군 제2지대(支隊)에서 미국 정보기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지원하에 한반도 진입을 위한 특수훈련을 마친 지하공작대(제1기생 50명)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 군사사절단(18명)이 탄 미군 수송기에 사령관 이범석과 함께 편승해 8월 18일 낮 12시 30분쯤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한다. 그러나 해외 독립운동가로서 가장 먼저 해방 조국의 땅을 밟은 영광도 잠시, 이들은 착검한 일본군에 포위되어 비행장에 연금된 채 이튿날 미군과 함께 추방된다. 일본은 패망했지만 '일본 조선군사령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지금은 일본이 정전만 한 상태이니 일단 돌아갔다가 휴전조약이 체결된 뒤에 재입국하라"는 거였다. 결국 선발대를 태운 미군기는 여의도비행장을 이륙해 복귀 중에 연료가 떨어져 산둥성 웨이현에 불시착했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위한 OSS특수훈련을 마치고서도 자기 땅에서 쫓겨난 울분에 찬 청년 3명이 시안의 제2지대로 복귀하기 전에 이국땅의 한 사진관에서 여의도비행장 착륙 당시의 복장을 하고 기념촬영을 하게 된 배경이다.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건 이 아름다운 청년 중에서 가장 앳되고 무선 통신에 능했던 노능서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해운업에 종사했다. 이범석 장군 부관을 지낸 김준엽은 중국에 남아 학문의 길을 걸어 고려대 총장을 지냈으며, 장준하는 70년대 <사상계> 발행인이자 정치인으로서 일본군 소위 출신 대통령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의 평생 동지이자 '연인 같은 절친' 관계였던 김준엽(1920년생) 선생이 7일 91세로 영면했다. 고인은, 소설가 서해성의 말처럼 '삶을 교과서처럼 쓰신 분'이었다. 후학들에게 책에서 배우지 않는 걸 온 몸으로 가르쳐준 '시대의 스승'이었다. 격동의 20세기를 온 몸으로 돌파해온 고인의 일생엔 두 차례 결정적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평안북도 강계 출신으로 신의주고보를 졸업한 그는 일본 게이오(慶應)대 사학과에서 유학하던 1943년 10월 일제가 '학도 지원병제'를 시행하자 유서를 써놓고 '자원 입대'한다. 중국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실제로 이듬해 입대 후 중국 서주(徐州) 근처의 경비중대에 배속된 지 한 달여 만에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첫 번째 결정적 선택이었다. 이후 중국군 유격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하다가 다시 6000㎞를 걸어 충칭(重慶)의 임시정부에 합류하는 장정(長征)에 오른다. '시대의 스승'이었던 진정한 보수주의자 김준엽 두 번째 결정적 선택은 해방 이후 임정 요인들과 광복군이 귀국할 때 환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중국사를 공부한 것이다. 김구 주석은 그에게 함께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했고, 6000㎞ 장정과 생사를 함께 한 평생 동지 장준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당시 정계 투신과 학자의 길 중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학자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후 초대 내각 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도 거절했다. 그는 회고록 <長征(장정)>에서 자신의 선택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때의 나의 선택은 나의 일생을 지배하였다. 나는 고대(高大)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40년간 이때의 결심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지켜내려 왔고 수 차례의 벼슬 유혹이 있었으나 아무 거리낌 없이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국가발전에 있어서의 나의 역할에 대한 소신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몇 차례 중대한 선택을 해야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특히 20대에 세운 가치관은 이러한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나는 믿는다." (<장정 1 - 나의 광복군 시절>, 452~453쪽) 고인은 20대에 선택한 학문의 길을 초지일관해 평생 현대 중국과 공산권을 연구한 1세대 학자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중국공산당사>와 <한국공산주의운동사>(5권, 공저) 같은 기념비적 연구-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이 소장(1969~1982)으로 재직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키워냈다. 고인의 고려대 총장 재임기간(1982~1985)은 짧았지만 그 시절을 함께 한 학생들에게는 '영원한 총장'으로 기억된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의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 데모 주동자를 징계하라는 정권의 압력을 "내가 그만 두겠다"며 막아낸 버팀목이었다. 1985년 2월 고려대 졸업식에서 재학생과
로그인 하시면 이 글에 대한 코멘트를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LOG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