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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mson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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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와 관련된 전설
05/08/2009
Posted by Los Angeles 이.애란 (국문 92) Bt_email
Annekong

고려대 재학생 커뮤니티 "고파스"에서 퍼온 글입니다. (작성자: 히로)
원문 url: http://www.koreapas.net/bbs/view.php?id=best&no=165

 

[고대 체육복] 
고 려대학교 신입생들이면 누구나 지급받는 고려대학교 체육복은 색상이 희고 붉은 줄이 그어져 있는 데다 체육복 앞 뒤로 "KOREA"라는 글자가 박혀있어 꼭 국가대표 유니폼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대학시절 비교적 체격이 좋은 편이었던 나는 고대 체육복을 입고 동네 한바퀴를 돌 때마다 동네 꼬마들이 "와! 국가대표다!"하고 쫓아다니는 통에 큰 곤욕을 치러야 했고, 그때문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대생들은 '창피함' 때문에라도 고대 체육복을 운동복보다 주로 잠옷으로 입어야 했다. 그 덕분에 고대생을 아들딸로 둔 많은 가정에서는 매일밤 국가대표처럼 화려한 유니폼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 아들딸의 모습들을 지겹도록 봐야 했었다고 전해진다. 

[철학자 김용옥] 
1982년부터 1986년까지 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교수직을 역임하다가 지금은 한의사 겸 인기강사로 활약하고 있는 도올 김용옥 선생은 교수 재임시절 거침 없는 욕설과 유머, 해박한 고전지식 등으로 뭇 고대생들을 매료시키며 교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었다. 본인 입장에서야 경기고-서울대를 나오지 못한 자기 학벌 콤플렉스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기존의 통념을 뒤집고 엄숙주의적 위선으로 가득찬 특권적 학문사회에 도전하며 파격과 기행을 보여줬던 것은 분명히 많은 고대생들에게 일말의 통쾌감과 대리만족을 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그의 강의 역시도 동서고금을 호쾌하게 가로지르며 걸쭉한 입담으로 청강생 모두를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고 기억된다. 

하 지만 고대생들 가운데서도 무시 못할 다수는 김용옥 교수의 과도한 자화자찬과 지적 폭력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김용옥 교수의 교양강의를 우연히 수강하게 되었다는 어느 고대생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첫날 강의시간이 아직도 안 잊혀집니다. 강의시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엔 포마드를 바르고, 007 가방을 든, 검은 두루마기 한복차림의 기괴한 신사가 나타나더라구요. 그러더니 연이어 육두문자를 쏟아내기 시작하는데... 정말 이런 분도 교수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축구선수 노정윤] 
나랑 같은 '89학번으로 고대 축구부에 들어왔던 노정윤은 '87학번 홍명보, '88학번 서정원의 뒤를 이어 90년대 초반 막강 고대 축구부의 신화를 만들었던 주인공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고대 운동부 선수들이 그러했듯이 노정윤 역시도 다른 모든 시합보다 고연전(고려대와 연세대 간의 정기체육제)에서의 승리를 더 중요시하던 그런 선수였는데, 많은 고대생들이 그런 태도를 배타적 엘리트의식으로 마치 않게 생각하고, 외부인들도 그런 모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상식에 속했지만, 우리의 우직하고 눈치 없던 노정윤은 어느 방송프로그램에 초청받은 자리에서 진행자가 "올해의 각오를 말씀해주신다면?"하고 묻자 또다시 이런 대답으로 장내를 썰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올해 고연전에서도 저는 열심히 싸워서 또다시 필승, 전승, 압승을 이끌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축구선수 차범근] 
고 대가 낳은 위대한 축구선수 차범근('72학번)은 대학시절 연대음대생(지금의 아내)과 연애를 했는데, 그 시절 친구들로부터 "밤마다 고연전"할 것이냐는 둥 "밤마다 고연전, 아침마다 승리호"할 것이냐는 둥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당시 연대음대생이던 그의 아내는 연대 친구들로부터 "고연전하기 전날 범근이에게 술을 먹여라" "감기 걸리게 만들어라" 등의 독촉을 받았지만, 전혀 그런 음모를 실행하지 않았으며, 두 사람의 사이에서 난 아들 차두리는 어머니의 모교 연대가 아닌, 아버지의 모교 고대에 축구특기생으로 입학했다고 한다. 

차범근이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던 시절 독일에 유학 나와있던 많은 고대 출신 학생들은 다른 대학 출신 학생들보다 훨씬 더 자긍심을 갖고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독일인들과 사귈 때나, 같은 한국 유학생들과 대화할 때나, 대뜸 차범근 동문 얘기만 꺼내면 대화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다른 대학 출신 학생들에게 부러움도 많이 받아 당시 독일 유학생사회에서는 아주 황당한 유머가 떠돌기도 했는데, 그 유머를 잠시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차범근을 보고 독일인이 놀랐던 세가지 이유 
1. 차범근이 축구장에서 워낙 빨리 달리고 축구를 잘해서 
2. 그렇게 축구를 잘하는 차범근이 한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했다고 해서 
3. 그렇게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차범근이 독어는커녕 영어도 한마디 못한다고 해서 


[야구선수 선동렬] 
고 대가 낳은 위대한 야구선수 선동렬('81학번)은 대학시절 주량이 양주 2병이었으며 담배도 하루 두갑씩 피웠지만, 술자리에서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술이 셌다고 한다. 졸업후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가 되고 나서도 상대팀의 고대 선후배들과 경기 전날 새벽까지 술 마시는 일이 잦았으며, 특히 그날 경기의 점수에 여유가 있을 때는 고대 선후배들의 타율을 올려주기 위해 일부러 고대 동문들에게 안타를 많이 맞아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선동렬이 투수로서는 환갑을 다 넘긴 나이에 한국야구보다 훨씬 수준이 높은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서 한국에서보다 더 나은 활약을 보이자, 그의 일본진출을 안타까워 하던 해태 타이거즈 김응룡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놈의 술을 안 먹어서 그래요. 술!!!" 



[시계탑] 
고 려대학교 문과대학 건물 꼭대기에 달린 시계탑은 정시마다 종을 울리고 특히 정오에는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에 맞춘 묵직한 음악종소리를 울려 고대의 명물로 불리웠다. 그런데 대다수의 고대생들은 위의 '새.야.새.야.' 음악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슬로우모션으로 몸을 움직이는 장난을 매일마다 되풀이했으며, 심지어는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다가도 위의 종소리가 울리면 종소리에 맞춰 소변을 차례차례 발사하는 엽기성을 발휘하곤 했다. 물론 시계탑의 종소리는 지금도 고대에서 매일 정오때마다 어김 없이 들어보실 수 있다. 



[막걸리 찬가] 
고 대생들이 가장 즐겨부르는 노래는 뭐니뭐니해도 '막걸리찬가'라고 할 수 있다. '마.셔.도. 사나이답게! 막걸리~를 마셔라~ 맥.주.는. 싱거우니! 신촌골로 돌~려~라~'로 이어지던 이 노래 가사는 고대생들의 서민적이고 용맹한 기상을 표현하는 노래로, 몇십년을 두고 많은 고대 동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는데, 한편으로 그 가사의 내용은 너무 남성편향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 노래에 대한 여학우들의 항의가 잦기도 했다. 특히 노래를 시작할 때마다 고대생들이 외치던 '마실까말까 마실까말까 에라X팔 니미X도'라는 욕설은 고려대학교의 점잖은(?) 평판을 손상케 할 만큼 저급한 것이어서, 이를 우려한 일부 고대생들은 그 노래 도입부를 영어로 번역해서 부르기도 했는데, 여기서 잠깐 그 영어번역 도입부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Drink or not, drink or not, son of the bitch, god them, fuck you."

한편 연대생들도 이노래의 가사에서 막걸리를 생맥주로 바꾸어사 '생맥주찬가'로 고연전 응원가로 써먹기도 했는데, 후렴부분은 양교 모두 똑같이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후렴) 이대생도 우리 것, 숙대생도 우리 것, 과부, 수녀, 비구니도 양보못한다~~. 




[창녀와 고대생] 
고 대 근처에는 미아리텍사스와 청량리588이라고 해서 커다란 창녀촌이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나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여자들 상당수가 고대 앞 제기동에서 자취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지방 출신으로서 마찬가지로 외로운 자취생활을 하고 있던 대다수 고대생들은 매일 오후 4시~5시마다 야한 옷차림으로 고대 정문 앞에서 택시를 잡는 그녀들에게 드물지 않게 혹하였고, 심지어는 그런 창녀나 술집여자들을 여자친구로 두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옛날 고대 석탑축제 기간동안에는 수많은 창녀, 술집여자들이 고대 남학생들의 초청을 받아 고대 캠퍼스에 몰려왔으며, 짙은 화장과 야한 옷차림을 한 채 고대 남학생들 틈에 섞여 신나게 막걸리를 얻어마시는 광경이 흔하게 목격되곤 했다. 



[양호기(養虎記)] 
고려대학교 제2대 총장이었던 현민 유진오 선생께서는 건국헌법을 기초하신 헌법학의 권위자이자 무지막지한 주당으로서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틀을 만드셨다고 일컬어지는 분이시다. 이 분의 자서전 '양호기(養虎記)'에 보면 1950년대 고대생들이 얼마나 터프하고 와일드했었는가를 한 눈에 엿볼 수 있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옛날에 고연전만 하고 나면 연대생들과 고대생들 간에 패싸움이 일어나 고대생들이 연대생들을 자주 구타하곤 했다는 대목과 함께, 그 유명한 '서울상대 습격사건' 이야기가 독자들의 폭소를 자아낸다. 그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고대 바로 옆에 위치해있던 서울상대(오늘날 서울대 경영대의 전신)는 그 정원이 고대정원 전체와 엇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기질이 워낙에 문약하여, 허구헌날 서울상대생들이 고대생들에게 두들겨 맞곤 했다고 한다. 그러자 약이 오른 서울상대생들은 어느날 연대와 고대의 축구경기가 열린 운동장에 단체로 몰려가 아주 밉살스럽도록 연대측을 응원하였는데, 그 결과 심리전에 말려든 고대축구부가 연대축구부에게 패하자 진노한 고대생들은 경기가 끝난 후 서울상대생들이 모여있던 관람석으로 마치 노도와 같이 밀고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영리한 서울상대생들은 경기가 끝나고 고대생들이 교가를 부를 동안 모두 도망을 가버린 뒤였고, 이에 화가 난 고대생들은 서울상대 캠퍼스(당시엔 서울대 캠퍼스가 단과대별로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었음)로 몰려가 건물 유리창을 모두 박살내버리는 가공할 복수극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는데, 당시에 이 사건은 당연히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그 일로 고려대학교측은 서울상대 건물의 깨진 유리창값을 모두 물어주는 고역을 치렀다고 하며, 그 뒤로 고대생들은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서울상대생들과 오히려 더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깡패와 고대생] 
이 미 일제시대부터 고대생들이 주먹싸움에 능했다는 사실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학생주먹의 대장으로 나오는 엄동욱(신마적)이 보성전문 법과생이었다는 것만 봐도 충분히 확인해볼 수가 있다. 그렇게 일제시대 종로바닥까지 위세를 떨쳤던 고대생들의 주먹은 세월이 지나면서 안암동 근방으로 그 구역이 좁혀지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학교 다니던 때까지는 고대생들의 주먹힘이 아직 남아있어서, 안암동 근처 깡패, 양아치들이 고대생들에게 두들겨 맞을까봐 감히 고대 근처에는 범접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는 일부 선량한 깡패들이 술취한 고대생들(특히 군대에서 휴가나온 고대생들)에게 이유없이 무차별 린치를 당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곤 했는데, 멀리 신촌바닥의 경우 연대 남학생, 여학생들이 걸핏하면 늦은 밤 하교길에 깡패들에게 폭행당하거나 성추행당하여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당시 고대생들의 터프함이 어느 정도였을지 대충 짐작이 되시리라 믿는다. 그래서 고대생들이 술에 만취한 채 인근의 깡패, 양아치들을 마구 폭행하는 것이 눈에 띨 때면 안암로타리 인근에서 장사를 하시던 많은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이렇게 중얼거리곤 하셨다고 한다. 

"고대생들은 대학생이 안 되었으면 다 깡패가 되었을 놈들이여..." 



[사발식] 
고 려대학교에 전통적으로 이어져내려오는 사발식이라는 행사는 모든 고대 신입생들이 선배들 앞에서 자기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고, 막걸리찬가가 울려퍼질 동안 한 사발의 막걸리를 다 마셔버리는 신고식 행사이다. 이런 사발식은 신입생 환영회때만이 아니라 군대 갔다 복학했을 때, 누군가 어떤 모임의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을 때, 아니면 그냥 재미로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한 사람이 보통 졸업할 때까지 최소한 대여섯번은 하게 돼있는데, 이 사발식을 거치지 않으면 그는 고대생이라고 인정받지도 못하고, 사발식을 두려워 하다가는 고대 내에서 그 어떤 모임에도 낄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사발식은 고대 내에서 아주 중요한 행사로 여겨져 왔다. 나 역시도 학창시절 열번도 넘게 사발식을 하면서, 처음엔 오바잇하느라 고생하고, 나중엔 배가 불러서 고생하고, 말년엔 옷에 막걸리 묻는 것때문에 무척 짜증나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은 이렇게 사발식이 무시무시한 것처럼 보여도 아직까지 사발식하고서 고대생이 죽은 사건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긴 원래 알코올도수가 그리 높은 술이 아닌 데다가, 인체가 필요로 하는 8종의 필수 아미노산과 비타민 B1, B2 클린 등 B복합체를 풍부히 함유하고 있고, 성인병의 원인물질인 콜레스테롤을 줄이며 혈당 감소를 막아주는 등 인체와 친한 술인 막걸리가 아무리 한꺼번에 인체 속에 많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고대생들의 강인한 명줄을 끊어놓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장 건강하고도 안전한 신고식으로 여겨져왔던 고대의 사발식에 대한 내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사실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차피 도로 꺼낼 걸 뭣하러 그렇게 집어넣나..." 




[고대생들의 미팅] 
여 대생들 사이에서는 한때 '고대생과 첫미팅을 하면 대학 4년이 재수없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로, 옛날 고대 남학생들은 미팅 나가서 3M을 철저히 무시하는 사람들로 통했다. 그 3M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Manner, Mood 그리고 Money로서, 그렇게 무례하고 뻔뻔하기로 악명을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고대 남학생들은 번번히 미팅을 나갈 때마다 다시금 대형사고를 쳐서 주선한 친구들을 본의 아니게 욕먹이곤 하였다. 

대표적인 사고로는 미팅 자리에 토큰 하나만 들고 나가 여학생한테 커피 얻어마시기, 낮술 마시고 잔디밭에서 잠 한숨 때린 다음 머리카락에 지푸라기 묻힌 채 미팅 나가기, 노래방에 같이 가서 줄창 트로트만 부르기 등이 있었는데, 그런 무례를 당하고도 여학생이 참아줘야 사나이 일편단심 순정이 비로소 시작된다는 게 고대 남성들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지만, 그 어떤 여자들도 초면부터 그러한 무례를 참아줄 리는 없는 법.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고대생들은 졸업하는 그날까지 싱글로 썩는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의 연말연시를 동성애자처럼 남자친구들끼리 모여 술이나 퍼마시고 허송세월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구선수 박 한] 
고대가 낳은 위대한 농구선수 박 한은 대학시절 연대 농구부의 골게터 신동파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둘 다 그만 어느 아름다운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게 되자, 박 한은 신동파와 술을 마시며 "만약 내가 그 여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다"고 맹세하였고, 딱하게도 그때 그 여자의 사랑을 얻는 데 실패한 박 한은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독신으로 살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한때 연대의 최희암 감독이 연세농구의 전성기를 구가할 동안, 고대 농구감독으로서 비난의 십자포화를 한몸에 받던 박 한은 맨날 술만 퍼마시고 작전계획이나 훈련지도에는 등한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다 언젠가 고연전 경기 중 그는 작전 타임을 걸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팀이 안되는게 두가지가 있다. 그건 오펜스와 디펜스다" 라고 . 시간은 흘러 종료직전, 1점을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고대 '94학번 현주엽 선수가 자유투를 얻자, 박 한 감독은 작전타임을 걸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우리 팀의 이번 작전은 자유투 2개를 모두 집어넣는 것이다!!" 그 작전명령대로 현주엽은 자유투 2개를 모두 집어넣었고, 그날 고대 농구부는 오래간만에 연대농구부를 눌러이겼다고 한다.  훗날 프로 선수로 대성한 현주엽이 박한 감독아래서 지냈던 대학농구부 시절을 회고하면서 말하기를...."제발 작전다운 작전을 단 한번만이라도 해보았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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