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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盜用, 歷史捏造, 歷史歪曲…
09/13/2015
歷史盜用, 歷史捏造, 歷史歪曲…
副題: 中華人民共和國 戰勝節 70週年 閱兵式을 觀覽하고…
逢 南 韓 泰格(www.TedHan.com)
9월3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도 北京 天安門광장에서 전승절 70주년 열병식이 ‘성대하고 장엄하게’ 거행되었다. 한국의 언론에서는 박근혜대통령이 Host인 習近平주석의 오른쪽 또는 왼쪽 몇 번째에 섰고, 오찬(午餐)을 같이 하며 정상회담을 하였다는 둥 본질(本質)을 떠나 의전(儀典)이나 예우(禮遇)등을 거론하며 시청자들의 초점(焦点)을 흐리게 하고 있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현황은 의전이나 예우들을 가지고 시간을 보낼만큼 그렇게 평화롭고 한가롭지만은 않다. 심각(深刻)하고 막중(莫重) 상황이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천안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이다. 이 광장에 걸려있는 3 가지 사인이 있다. 중앙의 초상화 한 점과 양쪽에 Motto 두 점이 쓰여 있다.
왼쪽에는 中華人民共和國萬歲(중화인민공화국만세), 오른쪽에는 世界人民大團結萬歲 (세계인민대단결만세) , 중앙에는 왕조(王朝)시절 표현을 빌린다면 공화국의 시조(始祖)로, 미국식의 사용한다면 Founding Father(건국의 아버지)인 毛澤東(모택동 1893.12.26.~1976. 9. 9.)주석의 사진이 걸려있다.
일년 365일 걸려있다.
다시말하면 건국의 주역(主役)인 모택동주석의 공산주의 건국이념으로 전(全)세계인이 중국인들을 중심으로 대동단결하자는 의지(意志)와 염원(念願)을 담은 메시지인 것이다. 이번 행사는 전승절 기념행사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본(日本)제국주의와의 8년 전쟁(사실은 9.18. 만주사변부터 15년간)에서의 승리를 경축하는 ‘매우 뜻 깊은’ 기념식이었다. 여기서 주어(主語)는 보이지 않지만, 숨어 있는 주어는 ‘모택동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인 것이다. 금년의 행사는 70년째라고 한다. 역(逆)으로 계산하면 1945년 일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일은 1949년10월 1일이다. 그러니까 대일(對日)전쟁 승전일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樹立) 이전(以前)의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전쟁의 당사자(當事者)는 모택동도 아니고 중화인민공화국도 아니라는 말이다.
이번 전승절행사는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역사를 도용(盜用)하여 치룬 행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말할 것도 없이 전쟁의 당사자는 당시 중국, 중원(中原)을 지배하고 있었던 중화민국(中華民國 수립일: 1912. 1. 1. )과 장개석(蔣介石 1887.10.3.~1975. 4. 5.)총통(總統)정부였다.
그럼, 모택동이와 그 추종세력들이 이차(二次)에 긍(亘)한 국공합작(國共合作)시 항일(抗日)전쟁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전쟁에 임하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1- 모택동의 비서이며 수력부 부부장, 중앙당 조직부 부부장등을 지닌 리루이(李銳)가 저술한< 로산(廬山)회의 실록>에서 모택동의 항일전쟁에 대한 사고가 적나라하게 기술되어있다.
팔로군 부총사령관 팽덕회가 백단대전(百團大戰)을 발동한 사건은 팽덕회 숙청에서 중요한 죄증(罪證)이 되었다.
毛: 팽덕회는 우리 편이 아니다. 백단대전은 국민당을 도와 일본을 무리쳤던 것인데 이는 장개석군(軍)의 입지(立地)를 강화시켜 준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애국이 아니다.
일부동지들은 처음에 일본이 영토를 적게 점령할수록 좋다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나 그것은 짧은 생각이다. 일본이 영토를 많이 점령하게해야 우리측에 유리(有利)하다. 그렇지 않으면 장개석의 나라를 애국하는 꼴이 된다. 나라중에 나라 만들고 장개석,일본,우리(공산당) 삼자가 각축(角逐)을 벌리는 ‘삼국지(三國志) 형국’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盧山會議實錄”有些言論可以稱是毛在抗日戰爭中之思路:“你彭德懷那不是愛國,百團大戰是在幫國民黨打日本人,愛的是蔣介石的國,那不是愛國!”。又說,“一些同志認為日本佔地越少越好,後來才統一認識:讓日本多佔地,才愛國。否則便成愛蔣介石的國了。國中有國,蔣、日、我,三國志”。
-2- 1994년 모택동의 주치의 겸 비서인 리즈수이 (李志綏)가 촐판한 <모택동의 주치의 회고록>《毛澤東私人醫生回憶錄》(The Private Life of Chairman Mao),출판사: Random House (April 2, 1996)(영어), Taiwan Times (중국어)
이 책은 모택동 연구를 위한 필독서(必讀書)다. 543페이지에서 모택동이 일본 다나까(田中角榮)수상 회견시 담화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모택동은 수차에 거쳐 일본의 침략에 대해 거론하었다. 그는 중공은 ‘일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일본의 대륙(大陸)침략이 없었다면 우리는 국공합작이 있을 수 없고, 우리는 발전할 수 없고 최후 승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일본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면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데 내가 보건데 일본의 침략(侵略)이 없었던들 우리가 어찌 대륙을 정복(征服)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일본에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3-7.2.1 정책 즉 공산당이 항전시기의 정책---<항일이 1푼이면, 정부와 마찰 2푼,내부 확장은 7푼으로 비중을 두라 >「一分抗日、兩分應付、七分擴張」
일본과 비밀협정을 맺고 서로 충돌을 피하고 밀수,무역을 벌이고 아편을 생산하여 국민당 지역에 판매하여 자금을 모집하였다.
-4-소련인 피터.브라지미노프(Peter Vladimirov) (공산국제--코민테른 중공연안 대표 겸 타스통신사 특파기자)의 <연안일기>에는 항일전쟁시기 3년간 연안 중공중앙위원 자격으로 체류한 피터의 일기를 통해 중공의 중앙수뇌부의 내막을 낱낱이 파헤쳤다.
1937年7月, 일본은 중국과 전면전(全面戰)을 시작하였다. 모택동은 중공 고위간부들에게 항일 정책에 관한 긴급보고 하였다. 모택동은 보고에서 “우리가 항일을 많이해야 애국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장개석 국민당 정부를 돕는 일일 뿐이다. 중공의 조국도 전세계 공산당인(共産黨人)들의 조국(祖國)인 소련(蘇聯)이다. 우리의 방침은 일본으로 하여금 더 많은 영토를 점령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장.일,우리(蔣,日,我)삼자가 삼국지(三國志)와 같은 형국으로 끌고 갈 수 있다. 이러한 구도(構圖)가 우리에게 유리하다......우리 당의 무장력을 확충하기 위하여 우리는 ‘一分抗日, 二分應付, 七分發展’정책을 고수해야 한다. 그 누구도 나의 방침을 위반해서는 안된다.”
대만국방부가 펴낸《日军侵华八年抗战史》에 의하면 항일전쟁기(抗日戰爭期) 국민당 장군(將軍)의 전사자(戰死者)는 206명에 달하였으나, 공산당 장군 전사자는 2명에 지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중 풍설봉(彭雪枫) 장군은 사실 장개석 국민당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었다.
국민정부 국방부의 1947년 통계에 의하면 전체 항일전쟁중 국민당(國民黨)군대가 전쟁주체(主體)로 대일작전을 수행하였고 전사자만 322만명에 이른다. 전체 사상자는 416만명에 이른다. 수 십만명이 참가한 초대형 전역을 22번 치루고 대형 전투 1127번, 육군 사상 321만명, 해군 함정전부 손실, 공군사병 4321명 전사, 비행기 2468대 손실, 1000만명이상의 민간인 사망등 상상을 초월하는 희생을 치루고야 항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중화민국(中華民國)의 국군(國軍)이야말로 명실상부 항일전쟁의 공신 (抗日功臣)이며 항일주역(主役)이었다. 역사속에 묻혀진 이들이야 말로 대대로 역사의 영광을 누려야 할 것이다.
根據國民政府國防部1947年10月統計,在整個抗日戰爭中,國民黨軍隊在正面戰場上對日軍作戰,消耗合計3227926人,其中陣亡1328501人(包括8名上將,41名中將,71名少將,1.7萬名校尉),負傷1769299人,失踪130126人;因病消耗合計937559人,其中死亡422479人,殘廢191644人。兩項合計為4165485人,做出了巨大的犧牲。
蔣介石領導的中華民國政府歷經14年艱苦卓絕浴血抗戰,發動了大型會戰22次,重要戰役1127次,陸軍傷亡321萬多名官兵,海軍艦艇全部打光,空軍4321名飛行員犧牲,2468架戰機被擊落,終於贏得了抗日戰爭的偉大勝利。中華民國政府作為中國的唯一合法政府和抗日功臣,理所當然地對日軍受降和接管日占區享有一切主權和合法權利,並享有歷史所賦予的一切光榮。
中央編譯出版社出版한《血祭太陽旗》란 역사서적에 중국에서 전사한 일본장교가 126명이고 중공군과의 교전에서 전사한 자는 3명 뿐이다.
모택동의 일본인사들과의 담화를 빌면 2만5천명에 불과한 중공군은 8년 항전기간 721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7할의 힘으로 확장한 결과, 군대를 120만명으로 확충했고 1억의 인구를 가진 근거지(국가안의 국가)를 보유하게 되었다.
모택동과 그 추종 공산분자들은 일본의 중국침략을 계기로 장개석정부와 국공합작을 통하여 자기세력을 부식(扶植),확장(擴張), 성공(成功)을 거둔 집단이었다. 차라리 ‘일본침략’이 필요했던 세력이었다.
70년 지난 지금 대일본(對日本) 항전승리일(抗戰勝利日)를 기념, 경축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항전승리일(抗戰勝利日)기념식은 명분(名分)일 뿐, 열병식은 신무기 (新武器)를 과시(誇示)하는 자리 이외 다름아니었다.
자료제공과 도움말 주신 분: 劉剛(延邊태생으로 北京大출신, 漢高祖 劉邦(BC 247~BC 195)의 81代 孫이기도 하다.)
Written by Ted Han on September 7, 2015 NavyOfficer86201@gmail.com (718)63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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