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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美旅行 -Paraguayan War-
08/05/2012
南美旅行 -Paraguayan War- 逢 南 韓 泰格(www.TedHan.com) 휴가철이다. 많은 이들이 일상(日常)을 접고 휴가를 떠난다. 우리도 여행을 떠나 보자. 아주 먼 곳으로……그냥 휴식을 위한 휴가보다는 “배움”이 있는 역사여행을 떠나 보기로 한다. 적도(赤道, Equator)너머 우리가 사는 곳과는 계절이 다른 남반부로 가 보자. 세상에는 조상대대로 뿌리내려 살고 있는 원주민의 후예(後裔)들이 그 땅의 주도권(主導權, Hegemony)을 잡고 통치하는 나라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나라들이 있다. 다시 말하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고” 그 땅의 주도권을 잡고, 상층, 지배계급이 되어 통치하는 나라들이 있다. 전자(前者)에 속하는 나라들은 구(舊)대륙 즉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자리한 유구(悠久)한 역사를 지닌 나라들이고, 후자에 속하는 나라들은 1492년 이딸리아인 Christopher Columbus에 의해 발견(?)되어 주로 Spain, Portugal출신 Conquistadors에 의하여 정복된 신(新)대륙-Americas-에 건국된 나라들과 영국인 그리고 그 후예들에 의하여 수백 년간 통치되고 있는 대양주(大洋洲)에 세워진 오스트렐리아와 뉴질랜드 등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와 같은 미주 대륙이되, 북반부와는 절기(節氣)가 반대인 남반부에 자리한 Paraguay를 목적지로 잡고 떠나 보기로 한다. 그 많은 라띤 아메리까 국가 가운데 왜 Paraguay를 선택하였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다. 어떤 이는 이 나라가 South America의 중심(中心)에 있다고 하여 남미의 Corazon(Heart)이라고 부르고, 다른 이들은 이 나라가 “바다가 없는” 그래서 “개발이 더딘” 오지(奧地)중의 오지에 위치하여 있다고 하여, South America의 티베트(Tibet-중국의 西藏省)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과 18세기 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물결이 남미지역으로 들어 오기 시작할 무렵인 19세기 후반에 접어 들면서 1865년부터 5년간 이웃 나라인 Brazil, Argentina, Uruguay 3개국-The Triple Alliance(3국 동맹)-과 전쟁에서, 인구의 90%에 해당하는 백이십만(1,200,000)명이 전사(戰死), 학살(謔殺) 또는 질병으로 희생(犧牲)되었다는 사실을, 세상사에 조금은 밝다고 자처해온 필자가 최근에야 발굴(發堀!!!)하여 내었다는 것이 동기(動機)일 게다. Paraguayan War 또는 War of the The Triple Alliance(3국 동맹 전쟁)로 불려지는 이 전쟁은 우리에게는 1879년 대영제국(大英帝國)이 남아프리카 내 Zulu족을 상대로 별렀던 전쟁보다도 더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고종(高宗) 즉위 2년에 해당되며, 미국에서는 남북전쟁(Civil War)이 끝난 1865년에 남미 네 나라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을 분석한 이론을 들여다 보면, 학자마다, 전쟁 당사국마다 견해를 달리 하고는 있지만, 가장 전통적인 견해는 “고종의 부(父)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의 쇄국(鎖國)정책”에 가까운 보호무역정책을 통하여 산업기반을 갖춘 후, 대외무역(對外貿易)에 박차(拍車)를 가하려던 Paraguay Francisco Solano Lopez대통령이 바다가 없는 Paraguay가 인접국인 Argentina와 Uruguay를 지나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Rio de la Plata 강(江)어귀와 그 지역에서 대서양을 가로 지르는 Brazil내 지역에서 Paraguay의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정책과 주변 3국간의 이해가 상충하여 빗어진 전쟁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거의 100년이 지난 1960년대 들어와 Paraguay와 Argentina의 학자들은 당시 세계를 경영하고 있던 대영제국의 제국주의(帝國主義)정책이 이 전쟁을 유발시켰으며, 대영제국이 배후에서 조정하였다는 설이 크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당시, Paraguay는 200여명의 유럽과 미국의 기술자를 초빙하여 19세기 중반 이미 전보(Telegraph)수, 발신 시설을 가설(架設)하였고, 철도를 부설(敷設)하여 증기기관차를 이용한 최초의 남미 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철강, 섬유, 제지, 페인트 산업을 발전시켜 군함, 무기, 탄약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당시 신대륙에서는 미국에 버금가는 공업국으로 부상하였다. 생산설비을 완료한 Paraguay는 수출품을 실어 나를 항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공업화(工業化)를 완성시킨 내륙국이 그 생산품을 실어 나를 수로(水路)확보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다. 바다로의 진출을 추구하는 세력과 수로를 장악하고 있는 인근 세 나라가 충돌한 전쟁이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전세계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해 지지 않는 제국(The Sun Never Set-Empire)” 대영제국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들은 “새로”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는 Paraguay를 보고 만 있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최근 남미 학자들의 분석이다. 초반 군비와 병력에서 우세하였던 Paraguay군은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세 나라의 연합군 앞에서 수세(守勢)에 몰린다. 드디어 1869년 1월 1일 수도 Asuncion이 함락된 후, Lopez대통령은 저항 군을 결성하여 Asuncion 북동쪽에 있는 산중에서 재기(再起)의 기회를 엿보다, 1870년 3월 1일 브라질 Jose Antonio Correia da Camara장군의 휘하장병들의 급습을 받게 된다. 항복하면 생명을 보장하여 주겠다는 제안을 받으나, 그는 “! Muero con mi patria!” (나는 조국과 함께 죽는다.)라고 일갈하며 Camara장군에게 검(劍)을 겨눈다. 그는 Camara장군의 부하장교에 의해 그 자리에서 사살되고 만다. 이로써 인구를 감안한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사상자를 많이” 발생한 4국간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전쟁으로 Paraguay는 전국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3국 동맹국의 인명피해는 71,000명에 달하였으나, Paraguay의 경우는 인구의 90%가 전사 또는 전쟁으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하여, 전쟁에서 살아 남은 남자의 수는 28,000명에 불과하였다. 일으켜 놓았던 산업시설은 파괴되어 버렸고 많은 땅은 외국인 특히 Argentina인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하마터면, 한 나라가 지도에서 소멸(消滅)할 뻔 하였던, 잔인하고 큼직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물론, Paraguay시장은 영국상품에 개방되었고 영국으로부터 고리(高利)의 차관도입이 강요되었다. 경우는 승전국인 Brazil와 Argentina도 마찬가지였다. 전비(戰費)와 전쟁복구비용으로 영국 런던은행(Bank of London)과 Baring Brothers와 N M Rothschild & Sons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도입했어야 했다. Brazil의 경우 Getulio Vargas대통령(통치기간1930~1945)시절까지 원리금을 상환하여야 할 정도의 거액이었다. 전후, 전쟁당사국들은 엄청난 인플레를 동반한 금융위기에 시달리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노예들을 전쟁에 참전시켰기 때문에, 노예제도가 자연히 철폐되었다. 전쟁 동안 군부의 세력이 강화되어 향후, 군부가 매사(每事)에 관여하게 된다. 물론, 1889년에 군주제(君主制)는 철폐되고 공화정(共和政)이 실시된다. 전쟁이 종식된 지 105년이 경과된 1975년 12월 Brazil의 Ernesto Geisel 대통령과 Paraguay Alfredo Stroessner 대통령(두 사람 모두 독일계)이 “패전국” Paraguay 수도 Asuncion에서 양국간 우호, 협력조약에 서명, 양국간 전쟁의 앙금을 풀게 된다. 이는 영국이 대영제국이었던 시대 “슈퍼 파워”로서 각국의 외교정책을 배후에서 좌지우지 조정하였던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대영제국의 찬란한 영광(榮光) 뒤에는 17세기 초부터 영국이 주도적으로 역할을 수행하였던 노예무역(奴隸貿易, Slave Trade)뿐만 아니라, 아편전쟁(鴉片戰爭, Opium Wars) 그리고 위와 같은, 어두운 과거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필요가 있겠다. 미래는 과거 그리고 현재의 연장선상에 있으니까 말이다. 7월27일 개막된 런던올림픽에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잠시나마, 300년 이상 세상을 지배하였던 옛 영화(榮華)를 되씹으며, 향수(鄕愁, Nostalgia)에 젖어 드는 영국인들도 있지 않을까? 역사여행치고는 그리 “즐거운” 테마는 아니었을는지 모르나, 제국주의가 횡행하였던 시대 냉혹한 국제정치의 단면(斷面)을 알게 되었다는데, 독자 여러분들께서 의미를 부여하여 주었으면 좋겠다. 사족(蛇足): 1. 대영제국의 해군이 러시아의 남하(南下)를 견제하고자 남해 거문도(巨文島)에 진을 친 시기가 1885년(고종 22년) 3월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약 2년간이다. 2. 196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한국정부는 Paraguay에 수만에 달하는 이민자를 송출하였다. 과연 당시 한국정부가 이민을 내어 보낼 때, 해당국의 역사, 문화에 관하여 사전지식을 주입시키는 강의가 있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Written by Ted Han on August 5, 2012 NavyOfficer86201ahoo.com (718)63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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